[송수정의 사진] 핑계

입력 2010-12-30 18:10


올봄 서울 통의동 골목에 ‘류가헌’이라는 작은 한옥 갤러리가 생겼다. ‘사진 위주’라는 수식에 걸맞게 사진을 으뜸으로 전시하되, 가끔은 다른 장르를 소개하는 외도를 한다. 상업 갤러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예술지상주의자의 도피처도 아닌 이곳은 글쟁이 부인과 사진가 남편이 꾸린 곳이다. 전시장 인심이 너무 후해 도대체 무얼 먹고 사나 걱정이 들기까지 한다.

지난 21일 이곳에서 이색 전시가 열렸다. 전시 제목에는 작가의 이름을 내걸었으나, 막상 가보면 그 작가가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는 사진전. 도대체 누가 전시의 주인공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이 전시의 이름은 ‘강운구를 핑계삼다’. 강운구 선생의 칠순을 기념해 스무 명 남짓의 후배 사진가들이 여러 인연으로 찍어두었던 강 선생의 초상 사진을 한 점씩 내놓았다. 이십대의 까마득한 후배부터 중견의 구본창까지, 매체 인터뷰용 사진부터 촬영 현장에서의 기록 사진까지, 누가 찍었는지 언제 찍었는지에 따라 분명 같은 인물인데도 풍기는 맛이 다르다. 그럼에도 전시장에 들른 후배들은 어느 사진이나 꼬장꼬장한 성격은 그대로라며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대학 3학년 때 카메라를 잡기 시작해 동아일보 해직기자와 잡지 ‘샘이 깊은 물’ 사진편집위원을 거쳐 평생을 사진가로만 살아온 강 선생은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참지 못하는 성미로 유명하다.

평생 사진으로 우정을 맺어온 사진가 주명덕, 황규태 선생과 30년 동안 강 선생이 가는 촬영지마다 따라다니며 ‘조수’ 역할을 했던 출판사 열화당의 이기웅 사장도 기꺼이 사진으로 특별 출연을 자처했다. 평소 강 선생은 칠순은 물리적 나이일 뿐, 당신은 젊고 늙음과 무관하게 그저 사진가로 살아갈 뿐이라며 생일잔치를 마뜩지 않아 했다. ‘강운구를 핑계삼다’는 그럼에도 무언가를 하고 싶던 후배들이 궁리 끝에 생각해낸 그럴싸한 핑계거리다. 그 전시 앞에서는 선생의 표현대로 ‘주도 객도 아닌 난감한 처지’에서 딱히 말릴 만한 구실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날은 여러 가지 핑계가 등장했다. 핑계 김에 뉴욕서 활동하는 사진가가 귀국하기도 했고, 핑계 김에 서로들 망년회를 대신한 회포를 풀었으며, 핑계 김에 앞으로는 더 많이 사진을 찍어주자는 맹세를 했다. 이기웅 사장은 건배사에서 핑계가 너무 많아 무슨 핑계를 대야할지 모르겠다는 말로 뭉클함을 전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그날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누군가에게 기꺼이 핑계거리가 되어줄 수 있는 생의 아름다움에 관해 얘기했다. 그 마음을 강 선생은 인사를 대신한 편지글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핑계가 이렇게 황홀한 것인 줄을 처음 알았습니다.’

노장의 황홀한 고백은 긴 여운을 남긴다.

<사진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