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 수 없더라도 싸운다, 내 권리를 찾아… ‘호모 레지스탕스’

입력 2010-12-30 20:12


호모 레지스탕스/해피스토리/손익찬 외 6명

모니터 뒤편에서 각종 경제현상을 예견하던 미네르바가 구속됐을 때, 혹자는 ‘지방 전문대 출신 백수’라며 폄하했지만 그가 사회에 미친 영향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는 구속됨으로써 한국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가 과연 지켜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고, 무죄 판결을 받아냄으로써 부당하게 집행된 검찰 권력을 조롱했으며, 지난 28일에는 전기통신기본법 47조 1항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까지 끌어냈다.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했지만 그는 그저 평범한 누리꾼이었고 시민이었다.

법무법인 한결의 박주민 변호사와 박경신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 등 7명의 법조인들이 펴낸 ‘호모 레지스탕스’(해피스토리)는 계란으로 바위를 밀어낸 개인과 시민들의 투쟁에 관한 기록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호모 레지스탕스’들은 혁명을 말하지 않는다. 혁명보다는 훨씬 온건한 방법으로,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항해 법에 호소한 것뿐이다. 이조차 개인과 공권력이라는 다윗 대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21세기 한국이라는 현실에서 다윗은 매번 승리하지는 못하지만, 패했을 때조차도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낸다.

법은 기득권이 안주할 수 있는 울타리인가? 강자와 기득권층 뿐 아니라 서민과 약자들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안전장치 역할을 하는 게 법이라면, 억울한 일을 맞닥뜨린 사람들에게 법이 오히려 칼날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이 책에 실린 13건의 사례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법이라는 칼에 맞아 비명횡사할 수도 있었지만 또 다른 법에서 방패를 찾아내 투쟁했다.

그 중 몇 가지만 보자. 타워팰리스에서 양재천을 건너면 나오는 판자촌인 잔디마을에 거주하는 서모씨는 양재2동으로부터 전입신고를 거부당한 뒤 소송을 내 승리하고,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아냈다. 이른바 ‘떡값 검사’의 실명을 밝힌 노회찬 의원은 명예훼손 및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으나 무죄를 선고받았다. 지난해 12월 당시 이 사건을 심리한 항소심 재판부는 ‘뇌물을 받지 않았다’는 검찰의 주장에 대한 입증을 검찰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결론까지 내렸다. 거대기획사의 저작권 주장 횡포에 맞서 일개인이 권리를 쟁취한 ‘손담비 UCC 사건’(다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가요를 따라 부른 동영상이 저작권을 이유로 포털에서 삭제된 것)은 저작권자로부터 소비자가 손해배상을 받은 세계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13건의 사례에 등장하는 이들 가운데 몇몇은 자신들이 법원으로부터 끌어낸 판결이 어떤 사회적 의미를 함축하는 것인지 몰랐을 것이다. 몇몇은 용기나 특별한 사명감이 없었을 수 있다. 그들은 저절로 나서게 된 것 뿐이다. 법이나 권력은 그것의 정치적 의미를 자각하고 살아가는 인간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모든 이들의 생존이나 삶의 질과 연관돼 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그냥 그런 것’이라며 포기하지도, 시간을 아까워하지도 않고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끝까지 지켜내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적은 정부나 검찰 뿐 아니라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조용히 살아가려는 우리들이다. 그러나 소수의 ‘호모 레지스탕스’들이 지킨 것은 그들 자신의 권리였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시민 모두의 권리였다.

읽다 보면 문제를 제기한 소송 당사자 뿐 아니라 이들 옆에서 조연으로 활약한 변호사와 시민단체, 그들의 맞수인 검사와 판사들의 진면목이 언뜻언뜻 보인다. 2010년 말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 시대를 살아가는 개개인의 용기, 민주주의의 버팀목으로 기능하는 사법부의 독립까지 ‘호모 레지스탕스’는 이 모든 걸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간결하면서도 논리적인 문장은 읽는 맛을 더한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