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남도영] 신년연설서 듣고 싶은 말
입력 2010-12-29 17:53
“제가 실망시킨 국민, 저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았던 국민, 그리고 저를 미워했던 국민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용서하십시오.”
이 말은 2003년 1월 퇴임을 앞둔 체코슬로바키아의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이 했던 5분짜리 의회 고별 연설 중 한 대목이다. 유명한 극작가였던 하벨 대통령은 체코의 벨벳 혁명(무혈 시민혁명)을 이끌었고, 이후 14년 동안 대통령을 지냈던 인물이다. 재임 중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던 하벨 대통령도 물러나는 순간에는 자신의 반대자들에게 못내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다.
대통령의 성공은 반대자들을 어떻게 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직선제 이후 한국의 대통령들은 50% 안팎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 임기 5년을 지내면서 지지자는 줄고, 반대자는 늘었다. 퇴임 시 대통령의 지지율은 20%대에도 미치지 못했다. 퇴임을 며칠 앞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의 90%에 육박하는 지지율이 부러울 뿐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당시 득표율은 48.67%였다. 선거에 참여한 국민 중 절반 이상이 이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다. 집권 4년차를 앞둔 이 대통령의 최근 지지율은 40%대 중반을 유지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 대통령은 대선 당시 자신의 득표율을 지금도 지켜내고 있는 셈이다. 지난 3년간 정말 ‘열심히’ 일한 것을 국민들도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문제는 여전히 50% 이상의 반대자가 있다는 것이고, 반대자의 수치는 내년을 거치면서 급격히 높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4년차를 맞는 이 대통령은 이제 반대자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 됐다.
이 대통령은 다음주 초 취임 후 세 번째 신년 국정연설을 하게 된다. 지난 두 차례 신년 국정연설에서는 위기 극복의 의지와 자신감이 표현됐다. 2009년 첫 번째 국정연설은 글로벌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비장함으로 가득했다. ‘비상경제정부’ 구성이 제안된 것도 여기에서였다. 두 번째 2010년 연설은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G20 정상회의를 유치했고,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원전을 수주했고, 글로벌 금융위기의 고비를 넘겼으며, 친서민 중도실용 노선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이 대통령은 “2009년 우리가 얻은 것은 자신감”이라고 선언했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는 우리의 구호는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확신했다.
청와대 참모들이 세 번째 국정연설의 내용을 놓고 머리를 싸매고 있다고 한다. 경제 성장, 공정사회, 일자리 창출, 정치 개혁, 친서민 정책, 국방 개혁 등이 주요 내용이 될 듯하다. 제안을 하나 하자면, 이번 국정연설의 키워드를 ‘반대자와의 대화’로 삼았으면 한다. 이 대통령이 신년 국정연설에서 “올해는 저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았던 사람들, 저를 미워했던 사람들, 제가 실망시킨 사람들을 많이 만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어떨까. 어떤 정책적 대안 제시보다 울림이 클 수 있다. 이 대통령도, 전임 대통령들도 반대자와의 대화에는 인색했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듣기 싫은 말은 외면했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최근 기자에게 “노무현 대통령 시절 야당인 한나라당 의원들은 청와대에서 식사 한 끼 대접받지 못했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상황은 똑같다. 민주당 의원들은 청와대에서 밥 한번 못 먹었다고 말한다. 여야 관계가 제대로 될 리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원래부터 반대자와 대화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 듯하다. 이 대통령은 2007년에 출간된 책 ‘온몸으로 부딪쳐라’에서 “CEO의 뜻이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능력 있는 CEO라면 그들조차도 품고 간다. 그것이 조직을 튼튼하게 하고 건전한 인사 풍토를 조성한다.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내친다면, 자칫 독선에 빠질 수 있다”고 쓴 적이 있다. 신묘년(辛卯年) 새해에는 이 대통령이 민주당, 민주노동당, 전교조, 4대강 반대론자, 진보적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을 청와대로 불러 그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모습을 보고 싶다.
남도영 정치부 차장 dy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