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선 약사의 미아리서신] 눈이 맑고 큰 은경씨, 웃는 모습이 참 예쁘죠

입력 2010-12-29 17:45


정말 추운 겨울입니다.

한파 피해는 없으셨는지요. 우리네 삶에서 한파처럼 모진 시련이 얼마나 많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환난이 소망의 싹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환난 앞에서 무너지는 우리의 모습은 참으로 나약하기 그지없지요.

오십년 남짓 살아온 제 삶도 서너 차례의 모진 한파를 딛고 이곳까지 왔답니다. 제 삶에 남아있는 숙제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살을 에는 듯한 추위보다 더 아픈 일이 얼마 전에 제게 일어났습니다. 햇살이 따스하여 마치 봄날 같았던 날 제 모친께서 소천하셨습니다.

배추김치 200포기를 담가 이웃들과 나누며 온 동네에 김치 잔치를 풀어놓으셨던 어머님은 지하 저장실에 맛있게 담가 살포시 맛이 들어가는 동치미 세 항아리와 알타리 김치 한 항아리를 두고 어떻게 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평소에 건강하셨던 분이어서 한번도 상상해 본 일이 없었기에 밀려드는 슬픔을 어찌 할 수가 없었지요.

소식을 듣고 달려오신 교회 식구들의 진심어린 마음과 따스하게 잡아주는 손은 제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동네 세탁소 아주머님도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저를 보시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정신없이 첫날을 보냈고 둘째 날에도 제 아픔을 나누고자 찾아오는 많은 지인을 만나고 슬픔을 나누고 힘을 얻으면서 보내던 중 뜻밖의 조문객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집창촌에서 일하는 은경씨가 다른 아가씨와 함께 제 어머님의 영정 앞에 흰 국화를 올리고 다소곳이 무릎 꿇어 명복을 빌고 있었습니다. 저와 눈을 맞추고 인사를 나누는 은경씨의 눈 주위는 벌게져 있었습니다. “힘드시죠” 하며 은경씨는 제 손을 따스하게 잡아 주었습니다. 유난히 눈이 크고 맑은 은경씨는 호수 하나를 담고 사는 사람입니다.

무릎 가까이에 심한 상처를 입고 소독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밀착 붕대를 사용하여 안쪽에 고름이 가득차고 염증으로 인해 걷기조차 어려운 상태로 은경씨는 약국에 온 적 있습니다. 당장 병원에 갈 것을 권유하였지요. 행여 잘못되면 염증이 깊이 들어가 큰 병이 될 수 있기에. 그러나 은경씨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우겼습니다. 그러다가 잘못되면 영 못 걸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였고 같이 온 주방이모와 함께 병원에 가 치료를 받았습니다. 물론 의사 선생님한테 혼이 났었지요.

눈이 맑고 큰 그녀의 웃는 모습은 참 예쁩니다. 머리에 염색을 하지 않고, 손톱에도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은 그녀. “마치 늦깎이 대학생처럼 그렇게 청초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니 얼굴이 빨개지면서 환해집니다.

어느 날 저녁 감기약을 사러 약국에 들른 은경씨는 제가 듣던 목사님 설교 말씀을 유심히 듣더니 “참 말씀이 좋으시네요”하면서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답니다. 은경씨와 예수님과의 소박한 아름다운 교제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동네 아줌마 따라 나가 본 교회는 환하고 화려했다는 기억이 아주 강했다고 말하는 은경씨의 호수에는 별이 두 개 떠 있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과는 아주 다른 착한 사람들, 깨끗한 사람만 하나님이 예뻐하실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는 교회 계단을 올라갈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알게 됐어요. 고맙습니다.”

제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은경씨에게 오히려 제가 고마운 마음이 더 들었습니다. 모르는 이들에게, 잘못 알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듣게 하고 제대로 알려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런 은경씨가 저를 위로하러 찾아온 날, 아마 은경씨는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의 샘을 파 놓으셨는지를.

사랑을 베풀고 나누는 일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좋아하시는 일인지를.

또 베풀고 나누면 그만큼 그 샘물을 채우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인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은경씨가 삶을 나누고 함께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힘 있는 일인지 알게 되어 정말 기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