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도 매만져 주는 ‘가위손 쌤’… 춘천소년원 직업훈련 전임교사 조연진씨
입력 2010-12-29 11:20
소년원엔 소년원이 없다
춘천소년원엔 소년원이 없었다. 지난 22일 찾아간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 신촌리 372번지. 내걸린 간판은 신촌정보통신학교다. 검색해보니 대안학교다. 외관상 여느 학교나 다름없다. 다만 출입문 옆엔 방범초소 같은 경비실이 있고, 방문객이라고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황급히 걸어 들어갔다.
안내를 맡은 홍성길(45) 교무과장은 체격이 다부졌다. “이 방이 헤어반 아이들 숙소입니다.” 학교 건물 1층엔 방이 여럿 있었다. 헤어반 1반, 2반…. 방은 복도로도 창이 나 있었다. 안을 볼 수 있게. 숙소 안은 깔끔했다. 헤어 3반 반훈. ‘착하게 살자.’ 마침 담임 정재호(40) 교사가 지나갔다. 트레이닝 복 차림의 정씨는 호탕하게 웃으며 벽면을 가리켰다. ‘당부: 생활을 잘하라고 혜택을 주지 않는다. 생활을 잘해야만 혜택이 간다는 것을 명심하라.’
2층. 한참 들어갔다. 오후 2시 대낮에도 형광등을 켜 놓아 환했다. 눈어림으로 10여명. 제복 차림의 남학생들이 서로의 손톱에 매니큐어 칠을 하고 있었다. 빨강, 검정, 파랑…. 그때 하얀 가운을 입은 조연진(54) 헤어반 교사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제가 조연진이에요.”
조씨를 따라 들어간 방. 이번엔 20여명의 남학생들이 미용실 마네킹(가발이 씌어진 마네킹)에 일명 ‘로뜨(머리카락을 말아 올리는 기구)’를 말고 있었다.
“사선으로 들어가게 되면 넓어져 버리지. 좁아야 되지. 그게 정답이야. 응삼(가명)이 사탕 두 개!” 조씨는 사탕 두 개를 순식간에 응삼이 입 속으로 넣어줬다. “우리 아이들이 미용기능사 자격증 시험 준비 중이거든요. 저 쪽 네일아트 하는 학생들은 이미 시험 봐서 내일 모레 발표가 나요. 자자 또 잘하는 사람 뽑습니다. 35분. 준비. 시작!”
홍일점 선생님
조연진씨는 이곳 직업훈련 전임 교사 중 홍일점이다. 법무부 소속 직업훈련교사는 7급 상당 공무원이다. 지난해 2월 부임했다. 그 전엔 부산소년원에서 2년여간 주 3회씩 미용 기술을 가르쳤다. 지금은 오전 9시 출근해 6시까지 아이들을 가르치고, 시험 기간에는 늦은 밤까지도 아이들과 씨름한다.
조씨가 마지막 진로로 택한 자리. “돈을 많이 벌어도 또 아무리 벌어도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그런 고민을 참 많이 했어요.”
1983년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광주광역시 어느 헤어숍에서 6개월간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만둔 뒤 의자 하나 두고 자신의 미용실을 냈다. 의자 개수는 느는 손님만큼 늘었다. ‘가방 끈’이 짧아 속이 허한가 싶어 94년엔 대학에도 진학했다. 전공은 의상학과. 그러고도 속이 허해 조선대 미용향장학과 대학원에 들어갔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회란 대회는 죄다 나가 상장을 휩쓸었다. 부산에선 대학 강의도 나갔다. “욕심이 하늘을 찔렀죠.”
미용에 관해서라면 일인자가 되고 싶었다. 잠을 자면 나태해질까 봐 뜬눈으로 밤을 지샌 적도 많았다. 그래도 공허했다. “참 힘들게 살았거든요. 그 가난. 돈도 많이 벌고 싶었고…돈을 벌면 채워질 줄 알았죠.” 2007년 심신 상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용의 정점이라는 미용기능을 배우면서다.
패션으로 말하자면 오트쿠튀르. 오트쿠튀르는 기성복이 아닌 맞춤복 혹은 맞춤복 패션쇼를 말하며 그 자체를 예술이라고 한다. 미용의 오트쿠튀르를 완성하고 나니 맥이 풀렸다. 10만원짜리 마네킹 가발을 국수 가락 잘라내듯 싹둑 잘라대길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빈털터리가 됐다. 숍도 접고 가진 돈 전부를 투자했건만 남은 건 허망함 뿐이었다.
“혼자 저렇게 있으면서 도대체 뭐하려고 하냐. 그 돈이면 미용실 차려서 편안하게 살고, 늙을 때 생각해서 그러지. 식구들이 제 얼굴도 안 보려고 했어요.”
돈이야 다시 벌면 됐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이 문제였다.
부산에 자리 잡은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부산 수영로교회를 나갔다. 새벽기도, 금식기도, 철야기도. 간절히 간절히. “도대체 나를 어떻게 하라고 이 바닥까지 오게 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고 또 물었어요.”
그해 여름. 대학 강의와 직업전문학교, 여성회관 다문화가정 강의를 병행하던 중 부산소년원에서 시간제 강사 제의가 들어왔다. 교회 멘토 동생은 소년원에 가겠다는 조씨를 붙잡고 울며 기도했다. “‘언니 대단하다. 대단하다. 나는 너무너무 가슴이 답답한데’ 그러는 거예요. 저는 그랬죠. ‘뭐가 대단해. 당연한 일을 하는데.’ 그 친구는 앉아서 기도하느라고 정신없는데. 근데 왜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을까요.”
시간은 흘렀다. 부산 소년원에서의 강의를 마치고 춘천소년원에 정식 교사로 발을 디뎠다.
첫 사랑
춘천에 온 지 일주일 되던 날. 광주에 계신 노모가 돌아가셨다. 매일 문 밖을 내다보며 우리 딸 언제 오나 했던 노모. 2남4녀 중 셋째 딸. 왠지 어머니를 보러 가야만 할 것 같아 춘천소년원에 오기 전 한 번 들렀었다. 네가 좋아하는 일 하게 돼서 너무 좋다고. 병이 깊어 말씀도 못하시던 노모는 딸의 춘천행을 축하해 줬었다. 모친의 상을 치르느라 춘천소년원생들과 첫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눴다는 그녀. 눈시울이 붉었다.
조씨가 부산소년원과 춘천소년원에서 가르친 아이들의 편지를 책상 위에 펼쳐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선생님 제자 김현(가명) 이라고 합니다. 요번 대회로 인해 너무너무 감사드려서 편지 올립니다. 일단 먼저 감사하단 말 드리고 싶습니다. 저희를 위해 아끼는 시간 금 같은 시간을 쪼개면서 저희를 가르치고 여기저기에서 섭외 하시는 데 힘드시고 저희를 멀리 하지 않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저희를 끝까지 믿어주시는 데 저 김현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여기저기 피하려고만 했습니다.(중략) 딴짓하는 저를 포기하지 않고 키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만 하면 그것이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그 말씀을 버스 타고 오면서 이해를 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철부지 없는 저의 친구들에게 저의 주변인에게 다 말해주고 싶습니다. 아 지금 이 말이 아닌데- -; 아무튼 선생님, 태어나 상 탄 게 소년원일지라도 처음 상 받게 열정적으로 저희를 가르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죽기 전까지 꼭 갚겠습니다. 2010년 10월 5일 화요일 제자 김현 올림’
편지지마다 여백이 없었다. 아이들은 조씨 덕분에 자격증도 따고 미용대회 상도 탔다고 했다. 지난 5월 미용기능사 시험에 15명이 응시해 15명이 합격했다. 지난 9월 메이크업 3급 자격검정 시험에 20명이 도전해 전원 합격했다. 그리고 현이가 편지 쓴 10월 5일 강원도지사배 미용기능대회에 5명이 참가해 9개의 메달을 땄다.
“우리 아이들이요 서로 얼굴에 신부화장 해가면서 연습하거든요. 실전 당일에야 모델 처음 보는 거고요. 애들이 너무너무 떨어요. 대회를 치르고 난 뒤 그 아이들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져요. 모든 사람한테 감사하는.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건 긍정적인 사람이 된다는 얘기거든요. 우리 애들은 부모한테 자랑할 얘기가 없는 애들이에요. 그걸로 인해서 뭔가 자랑하고 싶어지고. 다른 걸 더 배우고 싶어지고.”
조씨의 말 속엔 “우리 애들”이 붙어 있었다.
“선생님 데이트 안 합니까” “내가 너희들의 첫 사랑이고 너희들이 내 첫 사랑인데 무슨 데이트를 하냐.”
나는 보호처분 11호
조씨는 “저는 보호처분 11호에요”라며 한바탕 웃었다. 보호처분은 죄를 범한 소년을 교정하기 위한 특별 조치. 죄급에 따라 1∼10호까지 있고, 조씨 반엔 10호(장기 송치 통상 2년) 아이들 32명이 있다. 춘천소년원 전체 원생은 131명이다. “저는 이 애들보다 여기 더 오래 있잖아요.”
절도로 춘천소년원에 들어온 10호 상민(가명·19)이. 남다른 손재주로 헤어디자인 실력이 일품이다. 이미 자격증을 다 딴 상민이는 조씨를 도와 조교 역할을 맡고 있다. 내년 4월에 퇴원하는 상민이는 군대에 가면 이발병으로 자원할 거고, 제대 후엔 헤어숍에 취직할 거다.
최근 퇴원해 헤어숍에 들어갔다는 철수(가명·19). 3개월 만에 그만두려 해 조씨에게 호되게 혼났다. '기술이 아닌 자세를 익히라'는 조씨의 충고. 마음을 다잡은 문수는 현재 숍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 폭력, 절도, 강도, 성폭력…. 죄목만 담자면 A4 용지 반 장을 훌쩍 넘어버리는 아이들이지만 조씨는 이들에게서 희망을 봤다.
“저는 제발 나가란 말만 안 들었으면 좋겠어요. 이 아이들이 있으니까 내가 살고 있다, 그렇거든요. 행복해요. 진짜 행복해요.”
그녀가 말하고 싶어 했다.
“소년원 하면 어둡고 무섭고, 뭐랄까, 검정색에 가까운, 무채색을 떠올리잖아요. 그럴 거 같지만 저희가 항상 얘기하는 것이 여기 오면 희망이 꽃 피운다고. 희망이 하나씩 하나씩 피어나서 자신감을 낳고. 보세요. 보이시죠.”
창 너머로 운동장을 내다봤다.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한 아이들이 축구공을 차고 있었다. 아이들이 떠난 빈 교실인데도 온기가 가득했다.
춘천=글 이경선 기자·사진 김태형 선임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