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회고록] 평택시 서순덕 할머니

입력 2010-12-29 17:32


“눈뜨면 성경 읽어 잘 때까지… 성경이 일이고 친구고 낙이지”

서순덕(87) 할머니는 나이 40세 무렵 둘째 딸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 교회 담임목사는 서 할머니의 사위가 됐다. 할머니는 농촌에서 자랐고, 산골짜기 작은 마을로 시집갔다. 늦봄이면 모를 심었고, 두레질도 곧잘 했다. 예수 믿지 않겠다며 고집 부리던 남편은 임종하기 전 “내 마음속에 예수가 가득혀”라며 눈을 감았다. 할머니는 7남매를 낳았다. 7남매 모두 장로이고 권사다. 할머니는 20여년 전 고향 부여를 떠나 평택 큰 아들네서 살고 있다. 말수가 적고 수줍음이 많은 할머니는 성경이 친구요 삶의 낙이다.

둘째 딸 낳으니께 45년 해방

나 자라난 데는 부여군 임천면 칠산리고, 나 열여덟 먹어가지고서는 양안면(현 임천면) 탑산리로 시집 왔지. 아 열여덟에 갔어. 옛날에는 다 그랬어.

자랄 때? 그때는 좋았지유. 그때는 정말 참 철도 모를 뿐 아니라 우리 올케가 너무 잘해가지고서 뭐 부엌일도 모르고 바깥일도 모르고 참 호강하고 컸지유. 아유 그때는 예수의 예자도 몰렀어유. 그니께 한 오십 냄겨 먹어서 믿었지유. 젊어서는 숫제<아예> 예수 안 믿었었슈.

근데 열여덟께 그냥 막 중신애미가 들락날락 하고, 그냥 막 출가해야 한다고 그서 난 아이구야 그냥 내가 지금 가서 남의 집 가서 살라나 싶어 가지구. 부모가 맺어준께 그냥 갔지유. 할아버지 이름이 나홍길씨. 이십셋에 장가갔으니까, 다섯 살 차이지유. 아유 그때는 좋고 낮은 것도 몰랐어유. 지금은 야 뭐 부부 간에 좋고 낮은 것도 덤덤하게, 그냥 부모가 맺어준 것에 그냥 사는 것으로 살지 좋고 낮은 것은 사랑도 모르고. 가서 그냥 정붙여 사니께 살겠더라구.

그때는 그 다 홑겹 다 꼬매서<꿰매서> 으른들<어른들> 수발해야 항께. 근데 어떻게 다행히 바느질 같은 건 우리 오라방댁이 너무 착해가지고 바느질 같은 것 가르채<가르쳐> 가지고서는 바지저고리 같은 것 다 핼 줄 알고 허니께 해서 수발했제. 바느질 못하면 큰 문제지. 직접 집에서 길쌈 해가지고, 지금 세상하고는 천지차이여. 공출도 2회 공출, 3회 공출도 해가서 배도 많이 고프고. 내가 그건 기억혀. 왜정 때 그때 흰옷을 못 입게 해고. 흰옷 입으면 꺼먼 옷 입으라고 검은색물 들어 있는 물총 쏘고 호랭이 가죽처럼 맨들어 놓고 그랬어. 우리 동상이 저기 학교 가는데 일본학교 갔어. 난 학교 안 갔어 못 갔어. 왜정 때 시집에 가서 애기 하나 낳고, 둘째 딸 낳으니께 45년 해방되더라고.

대가족 봉양

전쟁 겪었지유. 그러지유 피란 갔었지유. 저 시골로 시집가가서는 저 산골짜기로 갔었지유. 가니까 참 많이 고생했지유. 식량도 그렇고 옷감 같은 것도 모든 것이 귀해가지고서 아주 그냥 살기가 힘들었어.

그렇지유 농사짓고 살았지 시골서. 모도 내고 일도 많이 하고 응 그치. 어른들 긍께 시할아버지, 시할머니, 시어머니, 조카 그렇게 있더라구(시집가니까). 근디 그때는 옷감 같은 게 너무 귀해가지고서는 할아버지 할머니 수발하는 게 넘 힘들더라구. 집에서 부엌에 나와 가지고 짜가지고서는 그거 빨아가지고는 그때는 숫제 옷감이 없었어. 집에서 길쌈해가지고서는 그냥 어른들 봉양하련께, 얼마나 힘들고. 그때가 제일 힘들었어.

조카 어머니 그니께 우리 동서는 만주로 갔더라구 살기가 곤란항께. 만주로 갔어 벌어먹고 산다고. 조카만 집에다 초등핵교 다니게 해 놓구선 만주로 갔더라구. 그래서 나중에 한 몇 해 살다가는 어머니가 데려가더라고 조카를. 만주로 데려가더라고 그리고 다 돌아가셨대.

암것도 안 믿었어. 불교도 안 믿고, 천주교도 안 믿고, 몰랐어 그런 거. 제사 같은 건 또 지내유. 제사 같은 건 지내도 또 어디 믿고 또 어디 으른들 제사 지내면 따라서 제사 지내고 그랬지 뭐 절도 않고, 그냥 음식만 해서 으른들 제사 지내면 음식만 해서 대접했지.

내가 모시고 살았지. 시어머니는 80세 못 돼서 돌아가셨지. 애기 아버지(남편)는 72세에 돌아가셨고.

그래도 시집살이는 안했어. 우리 시어머니가 너무 좋으셔가지고. 우리 시어머니가 딸이 없어. 그려서 며느리를 딸마냥 대하고, 나도 우리 엄마마냥 대했어. 딸 하나 있었는데 시집가서 애기도 하나 안 낳고 죽었대. 아들이 셋. 큰아들은 만주로 가고, 막내는 결혼하고 또 얼마 안 있다가 하늘나라 가더라구.

마흔 살 넘어 둘째 딸이 전도

공부 잘 못 시켰어유. 내가 학비 같은 거 못 대줬어유. 이 늙은이는 낫 놓고 기억자도 몰랐어유. 내 이름자도 몰랐어. 나 교회 댕기라고 딸이 가르쳐줬어. 한 달을 가르치더라구 한 달을 가르쳐줘서 이제 간신히 성경책 보고. 지금도 현찮어<시원찮아>. 성경이나 봐서 읽지. 제 이름자도 못써. 십일조 같은 거 낼라면 우리 목사님 어떻게 눈에 띄면 웃길 거여. 아유 글자는 그냥그냥 읽는데 쓰는 것은 그냥 못쓰겄네.

예수를 우리 둘째 딸이 제일 먼저 믿었어. 믿음이 쉽게 들더라구. 젊어서는 한 오십 넘겨서는 자녀들이 다 믿음생활 해가지고, 자녀들이 전도 해가지고. 둘째 딸이, 우리 둘째 딸이.

그때 내가 오십이 안 됐을꺼여. 사십이세 땐가. 우리 둘째 딸이 그냥 나를 머리 빗기고 뭐 찍어 발라주고 그래 가지고 지가 데리고 가서 예수 믿게 했어. 처음엔 안 댕기다 댕기니껜 이상하더라구. 그냥 예수 예자도 몰라가지고 하도 그냥 따라서 따라가다 보니께 차차 믿음이 들고 재미있더라구.

강경에 있는 안성교회. 지금 둘째 사위가 된 분이 교회를 개척하러 왔어. 둘째 딸은 공부한다고 서울에 나가 있었고. 어느 날 교회 부잣집 할아버지가, 땅도 주고 한 그 할아버지가 날 불러서 “따님하고 전도사님하고 맺어주면 참 적합하겄다”고. 근데 나도 그때는 그렇게 우리 목사님이 좋더라고 사랑 많고 사람이 그렇게 어른스럽고. 뭐 하나 나이 작게 먹은 것 같지 않고 말 하나를 해도 깊은 말만 하고, 나도 좋아하는 판인디 그 할아버지가 그래 가지고 “제 마음은 그렇게 했으면 좋겠는디 바깥양반이 그렇게 승낙을 하려나 모르겠네유” 했더니 잘 알아봐서 바깥양반 설득해서 그리 맺어주라고 참 전도사가 너무 좋다고 할아버지가 그려.

집안에서 할아버지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 했더니 영감이 “사람이 너무 약해다고. 약해가지고서.” 그려서 내가 “아이고 약해서 살림 낸대유.” 내가 마음에 드니께. 그려서 내가 설득해서 결혼했지.

남편, 돌아갈 무렵에 예수 믿어

(남편은) 그렇지 안 믿었지. 돌아가실 무렵에 구원받았어. 교회 가는 거 가만 두는 것만 해도 감사했지. 성경책 찢고 어쩌고는 안 허고 그냥 교회 댕기는 것 좋아 않더라고. 좋아 않혀. 그래서 돌아가실 무렵에 그냥 구원받았어. 어려운 구원받고 가셨어. 아파서 갔어. 시름시름 앓다가 한 달 꼭 채우고 갔어. 자손들이 와서 찬송 부르고 그래서 돌아가실 무렵에. 나중에 돌아가실 무렵에 “내 마음속에 예수님이 가득혀.” 그러고 돌아갔어.

응 다 나가지. 근데 우리 막내아들이 믿음이 조금 약혀. 교회 댕겨라 하면 “잘 믿어유” 하는데 우리 며느리가 믿음이 좀 약허고 그래서 마음이 껄쩍지근혀. 틈만 나면 막내 위해서 기도만혀.

근데 난 너무 이렇게 약하고 너무 부족하고. 아유 난 너무 약혀. 너무 부족해. 아유 우리 목사님 뵐 낯이 없네.

(교회에서) 제일 대상<어른>이여. 다들 나보다 한 살 아래 두 살 아래.

잘 산다 안혀도 그냥저냥 살지유. 돈은 많이 없어도 믿음생활 잘하고 사니께 잘 사는 거지유.

큰아들 집. 딸 다섯 낳고서 밑에 아들 둘 났어. 아들 나려고 딸 다섯 낳았어. 참 그때는 아들 못 낳으면 안돼서. 우리 7남매는 다 효자유. 다 잘혀. 애덜이 용돈 주면 난 “너덜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했는데….” 참 좋은 맘이 없어 내가 떳떳이 받을 수가 없어. 마음이 즐겁들 안혀. 밤낮 죄책감이 있어.

주일날 돌아오면 좋고. 주일 지나가면 심심하고, 주일날만 돌아오면 좋은 거여.

예수님, 목사님 사모님 보고. 설교소리. 귀가 먹어가지고서는 설교말씀 제대로 못 들어. 반절은 알아듣고 내가 아는 말씀 하시면 듣는디 내가 모르는 말씀 하면 잘 못 알아들어. 답답해도 주일만 돌아오면 그렇게 좋은 거여.

딸보다 사랑하는 목사 사모님

난 너무너무 부족하고, 부족한디 이렇게 살게 해주셔서 감사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유. 내가 우리 하나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려야 되는데 내가 이렇게 해도 되나 항상 마음에 죄책감이 들어. 그래서 지금 동산교회 다닌 지도 몇 년 안돼유. 우리 동산교회 목사님 사모님이 너무너무 좋고 사랑스러워가지고 그날 교회 간 날 목사님 사모님 손을 잡고 나와야 교회 댕겨 온 것 같지.

내가 딸보담도 우리 사모님 더 사랑한거여. 우리 딸은 든든한 마음이고 우리 사모님은 손을 입에라도 대야 예배드리고 온 것 같어. 교회 다녀온 마음이 들어. 우리 하나님은 눈으로 안 보잉께 정말 우리 목사 사모님이 너무 사랑스러워 가지고 참말로 즐거운 마음으로 그 교회 댕겼제. 이 부족한 것을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셔서 참 감사하지. 늘 우리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기쁘게 못해서 그게 아주 마음에 죄책감이.

여기 평택 온 지는 22년 됐어. 동산교회 나간 지도 얼마 안됐어. 여기 와서는 동산교회를 몰라가지고는. 우리 딸이 평택에서 살다가 미국 갔구만. 딸이 댕기는 교회 갔지 평택교회라고. 그러다 여기 왔어.

성경책 몰랐으면 죽었을 거여

전도는 내가 아주 마음이 아픈 거여. 전도를 못해서. 참 내가 전도를 해야 하는디. 사람들 만나서 예수 믿자고 하면은 “난 천주교 다닌다 절에 다닌다. 난 안 믿는다.” 거기다가 뭐라고 혀. 전도가 참 어렵더라고. 전도를 해야 우리 하나님이 기뻐 하신다는데. 전도를 못해서 마음이 참 아프네.

(노인대학은) 한 3년 댕겼지 우리 목사님이 추천해가지고. 근데 나이가 너무 많이 먹응께 가기가 싫더라고 말귀도 못 앓아듣지. 뭐 집에서 며느리 도와주고, 성경책이 일이여. 노인정에서 오라고 해도 얘기도 못하고 화투도 못하고. 심심항께 성경책 붙잡고 늘어져유.

눈뜨면 성경 읽어 잘 때까지. 내가 성경책을 몰랐으면 진짜 난 죽었을 거여. 말씀 말씀마다 이해 안 가는 것도 있지만 참 기가 막힌 말씀도 많잖여. 그런 성경 말씀은 생각할 때, 목사님이 그런 말씀 하면 알아듣고 고개 끄덕끄덕하고, 그러지.

교회 근처에 살 때는 새벽기도도 댕겼는데 지금은 이사 와서 차타야 댕기니께. 아들이 너무 힘들어. 요즘은 못가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혼자 기도허제. 일어나기엔 3시에도 일어나고 4시에도 일어나고.

젊었을 때는 잠이 많응께 일찍 일어나기 대갈했지<힘들었지>.

나 천국가면….

제일 소원…. 지금 현재 소원은 우리 자손들 건강하고 예수 잘 믿고 사는 거 그게 소원이지.

내 소원은 그냥 아프지 말고 가만히 하늘나라 가는 것. 자식덜 고생 안 시키고 하늘나라 가는 거. 그게 진짜 소원이여. 칠십 때는 조금 더 살고 싶었는디 이제는 자식덜 고생 안 시키고 가는 거시여. 우리 하나님이 내 소원 들어주실 거여. 큰 사우는 하늘나라 갔고 둘째 사위, 막내 사위가 목사님이여. 나머지는 장로들이고.

넘들이 젊었을 때 살결이 희고 좋다고, 근데 나이 드니까 이렇게 거덕떼기<거적>마냥 검버섯 같은 게 생겨서 그래서 부끄러워서 어딜 가지 못혀. 교회 갈 때만 어쩔 수 없이 하나님 만나러 우리 목사님 사모님 만나러 가는 거지.

나 죽어 천국가면 “하나님 아버지 저 하나님 마음 기쁘게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 소리가 먼저 나올 것 같어.

■ 연보

1923년 3월 충남 부여군 임천면 칠산리에서 3남2녀중 넷째로 출생

1940년 부여군 임천면 탑산리에서 나홍길(당시 스물셋)씨와 혼인

1943년 장녀 명자 출생

1944년 차녀 월자 출생(성남 상원제일교회 사모),

1947년 3녀 성자 출생

1952년 4녀 성만 출생

1955년 5녀 성옥 출생(양주 덕정생명샘교회 사모),

1958년 장남 명채 출생

1961년 차남 윤채 출생

1989년 남편 나홍길씨 작고

■ 평택 동산교회는

1972년 피란민촌이던 경기도 평택시 비전2리(현 비전2동)에 세운 교회다. 집사들이 부지를 헌납해 설립했다. 소속교단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이다. 이춘수 목사가 현재 담임을 맡고 있다. 이 목사는 1985년 6대 당회장으로 부임했다. 25년째 효도여행 프로그램인 ‘경로여행’을 진행하고 푸른교실(노인대학)도 운영하는 등 지역 사역에 힘써 왔다. 2005년 9월 중국에 황관 동산교회를 개척했다. 등록 교인 수는 3000여명(031-655-6900).

평택=정리 이경선 기자·사진 신웅수 대학생 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