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 중국어 번역 박성국씨
입력 2010-12-29 17:36
한국살이 7년 중국동포 청년의 희망기도
조선족 박성국(28)씨가 경기도 하남시 제1가나안농군학교 김평일 교장을 만난 건 4년 전 이맘때다. 서울 중앙대 광고홍보학과 4학년이던 박씨는 김 교장으로부터 책 2권을 선물 받았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와 ‘내리 사랑 올리 효도’라는 책이다.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운 고(故) 김용기 장로의 인생철학을 다룬 에세이다. 김 장로의 아들 김 교장은 박씨에게 시간이 날 때 한번 읽어 볼 것을 권했다. 괜찮다면 번역을 해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며칠 후 박씨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지난 주일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찾은 박씨를 만났다.
신분증에 한글과 한문, 영문표기도 아닌 국적불명?
박씨는 2003년 가나안생활협동조합 김종억 소장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 왔다. 대학에서 광고 관련 공부를 하기 위해서다. 박씨의 한국생활은 역경의 연속이었다. 언어장벽과 문화차이, 조선족에 대한 편견의 벽을 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만나는 이마다 “보이스피싱 주인공 말씨다. 중국 사람이 아니냐”는 등의 황당한 말을 들을 땐 괴롭고 슬펐다고 토로했다.
박씨는 또 자신의 신분증에 올바로 된 이름 표기가 없다고 했다. 한글이나 한자가 아니라 중국식 발음표기인 병음을 쓰기 때문이다. ‘PIAO CHENGGUO’. 외국국적동포내거소신고증(체류자격 F4)에 표기된 이름이다. 중국 발음은 성조가 있는 만큼 발음하기 따라 완전히 다른 뜻이 된다는 설명이다. 조선족은 누구나 자신처럼 한국과 중국식 표기도 아닌 국적 불명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대기업 공채는 대부분 홈페이지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외국인이라 아예 가입조차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박씨는 모든 장애물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대학 2학년 때 우연히 인연을 맺은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 한강센터에서 쌓은 신앙훈련의 덕이었다. 조선족이 4년 만에 한국에 있는 대학을 졸업하기 힘들다는 상식을 깨고 세 번의 장학금까지 받으며 졸업했다. 대학원도 수료했다.
3년 전부터는 가족이 함께 산다. 먼저 온 누나와 뜻을 모아 중국 톈진에 살던 부모를 한국으로 모셔왔다. 그러나 가족상봉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경우 교사 신분이었지만 한국에선 막노동밖에 다른 일자리가 없었다. 고민하던 아버지는 취직이 됐다며 편지 한 장을 남기고 가족을 떠났다.
그로부터 한 달 보름 만에 아버지가 고혈압이 악화돼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받았다. 담당 의사는 “뇌간 출혈이라 수술마저 안 되니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박씨는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고 털어놨다.
“정말 기도밖에 달리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어요. 그리고 무릎을 꿇었지요. 하나님 아버지, 죄인이 하나님께 회개하오니 저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제 목숨의 반을 저의 아버지께 드리겠습니다. 제발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한 길을 막으셨으면 또 한 길을 열어주실 것
박씨는 앞으로 10년을 일하면 1년은 반드시 남을 위해 봉사하는 생활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아버지는 병원 응급실에서 2주, 중환자실에서 한 달 정도 치료를 받은 뒤 극적으로 의식을 회복했다. 하지만 왼쪽 다리와 손을 쓸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 됐다. 그는 간호를 위해 공부를 미뤘다. 한쪽 무릎 관절이 퉁퉁 부어 잘 걷지도 못하는 어머니에게 간호를 맡길 순 없었다.
“아버지가 쓰러지신 것은 분명히 불행이죠. 하지만 저는 깨달았어요. 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알았죠. 제가 어렸을 적에 부모님이 이렇게 저를 키워주셨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꼈지요.”
그렇게 세 식구는 서울 능동 단칸방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1년을 보냈다. 그러던 2008년 4월, 박씨가 수업 중에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온몸에 열이 나고 얼굴 곳곳에 물집이 생기더니 참을 수 없는 통증이 계속됐다. 대상포진이었다. 의사는 젊은 사람은 잘 걸리지 않는 병으로 편하게 쉬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며 휴식을 권했다. 이때 1개월 정도 투병한 것을 제외하면 박씨는 단 한시도 번역하는 일을 멀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4개월 만에 2권의 책을 번역하는 데 성공했다.
요즘 그의 꿈은 석사 논문을 마치고 신학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한 현실은 녹녹지 않다. 당장 시집살이하며 친정 부모를 부양하는 누나의 부담을 더는 모른 체할 수 없어서다.
“누나 혼자서 벌어 제 등록금 대느라 허리가 휠 만큼 휘었거든요. 저는 누나가 힘들어 드러눕는 모습을 보면서도 내 공부만 하려고 했어요. 참 못난 동생이지요. 하나님께서는 한 길을 막으셨으면 또 한 길을 열어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새해엔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는 교회 있었으면
한국 생활 7년 동안 박씨는 이사를 열두 번도 더 한 것 같다. 이삿짐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냥 방을 옮긴다고 해야 옳다. 해마다 중형 크기의 여행용 가방이 하나씩 늘어 모두 7개가 됐다. 그 중 하나는 옷가방이고 나머지는 책이 들었다. 한번 옮길 때마다 용달차 1대를 부른다.
그는 요즘 모 홍보회사 인턴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다음달 중순이면 정식 직원으로 입사하게 될지 결정이 난다. 지난 14일 누나 집에서 상경한 박씨는 사촌동생이 지내는 서울 노량진동에 있는 4층짜리 다가구 주택 옥탑방에 임시로 거주하고 있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 25만원짜리다. 작은어머니는 얼마 전 불법체류자로 당국에 체포돼 중국으로 송환됐다. 다행이랄까, 작은아버지는 단속에 걸리지 않아 다달이 동생의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고 있다.
박씨는 이사를 자주 다니다 보니 정해놓고 다니는 교회가 없다. 등록할 만하면 짐을 싸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교회든지 마음 놓고 다닐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새해 소망이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분은 저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아버지를 이날까지 지켜주셨습니다. ‘내리사랑 올리효도’라는 책을 보면 자식으로서 어떻게 부모님께 효도를 실천할 것인지 나와 있습니다. 지난날 제대로 못했던 효도를 조금이나마 실천할 수 있어 저는 지금 매우 행복합니다.”
글 윤중식 기자·사진 신웅수 대학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