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수지 (4) 가난했던 어린시절 교회에서 인성 닦아
입력 2010-12-29 17:47
나는 성경적 가치관과는 거리가 먼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7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다. 지독히도 가난하고 어려웠던 어린 시절, 부모님은 늘 밖으로 일하러 나가시고 나는 두 살 터울의 여동생과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집에서 두부와 콩나물을 길러 내다 파셨다. 하루는 울어대는 동생을 데리고 시장에 장사 나간 엄마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어디를 가야 엄마를 만나나….’
다섯 살이던 나는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신작로를 타박타박 걸어갔다. 커다한 트럭이 굉음을 내며 우리 옆을 지나갈 때마다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우리는 금세 먼지투성이가 됐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누런 코를 흘리며 울어대는 동생을 데리고 무작정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노랫소리를 쫓아가 보니 조그마한 교회가 나왔다. 담도 없는 마당에서 젊은 여자 선생님이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선생님은 교회 앞에 쪼그리고 있는 우리를 보더니 뛰어나왔고, 동생을 안아 콧물과 먼지로 범벅인 볼에 뽀뽀를 했다. 그리고 펌프질을 해서 올린 물로 우리를 깨끗이 씻겨준 다음 사탕을 줬다. 어린 마음에도 ‘아, 이런 곳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교회는 좋은 곳’이란 인식이 뇌리에 박혔다.
그때부터 매일 교회를 다녔다. 교회가 동생과 나의 놀이터이고 생활이었다.
어린 시절 내가 교회에서 배운 것 중에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것이 하나 있다. ‘일일일선(一日一善).’ 하루에 한 가지씩 착한 일을 하라는 것이다. 어린 내게 착한 일이란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를 기쁘게 하려고 밥도 짓고 나무도 하러 다녔다. 엄마가 새벽에 시장에 나가시면 아침밥을 해서 엄마에게 가져다 드리고 학교에 갔다. 학교가 끝나면 교회에 가서 놀다가 다시 엄마에게 가서 빈 그릇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하곤 했다. 어느 날 엄마가 “너희를 착하게 가르친 선생님이 너무 고맙다. 교회에 가서 그분께 인사를 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엄마는 우리와 같이 매주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신앙적으로 성숙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은 고교 2학년 때였다. 당시 나는 서울 창신동의 교회에 다녔다. 무더운 8월, 한 호주 선교사님이 주일예배 설교자로 교회를 찾았다. 그분은 요한복음 3장 3절 말씀을 인용, 거듭남에 대해 전하셨다. 그때 성경에는 거듭남이 ‘중생(重生)’으로 표현돼 있었다. 그 선교사님은 나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아 유 본 어게인?(Are you born again?)”이라고 물었다.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는 건가?’
답답했던 나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열린 금요성경공부에 찾아가 미국 여선교사님에게 요한복음 3장 3절의 뜻을 물었다. 그분은 내가 죄인이며 죗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위해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고 설명해 줬다. 그러면서 마음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입으로 시인하라고 했다. 이후 나는 이 선교사님과 경건의 시간을 갖고 성경공부를 했다.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하나님을 만나게 됐다. 그리고 그해 가을 나는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을 때 나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다는 것이 강하게 와 닿았다. 그때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는 삶’을 살 것을 결심했다.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