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수지 (3) 삶의 희망 키우는 ‘사랑의 돌봄’ 규명

입력 2010-12-28 17:52


12주 과정이 끝나는 날 그 환자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내 연구실에 들어왔다.



“선생님, 저 이제 더 이상 안 와도 되지요?”

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이어가면서, 읽고 싶은 책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는 인사를 하고 나가다 말고 돌아서더니 뜸을 들이며 물었다.

“선생님, 제 친구를 데려와도 될까요?” “예, 데려오세요.”

바로 그 다음 주 토요일, 그는 두 사람을 데리고 나타났다. “한 친구는 청량리 정신병원에서 만난 친구고요, 이 사람은 양산병원에서 만난 사이입니다.”

세 사람으로 집단 상담을 시작했다. 그러자 다음 주에는 그들이 또 세 사람을 더 데려왔고, 그렇게 매주 사람이 늘어나 모두 13명이 됐다. 대부분이 전국의 여러 병원을 거치며 서로 알게 된 친구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모인 이 환자들은 ‘사람 돌봄’ 이론을 개발하게 해 준 토대가 됐다.

그때 마침 나는 미국 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 캠퍼스의 스트라우스 교수가 쓴 ‘근거 이론’을 우리말로 번역하던 중이었다. 이 책은 유사한 경험을 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아 체계화하고 이론을 개발하는 독특한 연구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이 이론을 토대로 환자들이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이후 오랫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구체적으로 연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이런 나의 생각을 밝히자 그들 중 9명이 동의해 줬다.

9명이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자신의 경험을 나눴다. 한 환자는 간호사가 자신을 돌봐 준 얘기를 했다. “정신병원에서 퇴원시켜 달라고 난동을 좀 부렸더니 나를 독방에 가두더군요. 퇴원시켜 줄 때까지 그럴 심산으로 먹지 않고 소리 지르고….”

3일 동안 굶었더니 배가 고프고 지치더라고 했다. 그런데 3일째 밤에 야간 당직 간호사가 들어와서 그를 달랬다.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해요. 먹지 않으면 퇴원할 수 없어요.”

간호사는 음식을 거부하는 그에게 미음을 끓여 가져왔다. 그리고 “숟가락 들 힘도 없지요?”하며 입으로 ‘후’하고 불어서 그의 입에 떠 넣어줬다. 그는 그 순간 어렸을 적 아파 누워 있을 때 엄마가 죽을 끓여 주던 생각이 나면서 가슴이 찡해졌고, 간호사가 주는 것을 다 받아먹었다고 한다. 다른 환자들의 얘기도 이와 유사했다. 놀라운 사실은 이 환자들 대부분이 자살을 시도했었지만 누군가로부터 친절한 돌봄을 받았을 때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것이다.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누군가로부터 돌봄을 받은 사례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이것이 두 번째 연구 주제였다. 이번에는 13명의 환자가 모두 참여했는데, 이들의 경험으로부터 모두 198가지의 구체적 돌봄 행위가 규명됐다. 그리고 다시 유사한 정신질환자를 대상으로 서너 차례 반복 연구를 했고, 이 내용을 분석한 결과 10개의 독립된 주제들이 나타났다. 이 돌봄 행위들이 바로 알아봐줌, 동참함, 나눔, 경청함, 칭찬함, 동행함, 희망 불어넣어줌, 안위해줌, 용서해줌, 수용함 등이었다.

결국 사랑의 돌봄 행위들은 환자로 하여금 삶의 위기를 극복하게 만드는 생명의 에너지를 제공하고 회복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지피게 함으로써 기적을 낳게 만든다. 이 10가지 돌봄 행위는 나중에 유엔개발계획(UNDP)의 지원을 받은 ‘수지 킴 프로젝트’를 통해 알려지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된다.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