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속 세상] 유전자원 27만점 품은 현대판 ‘노아의 방주’… ‘종자계의 한국은행’ 농업유전자원센터

입력 2010-12-28 17:19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農夫餓死 枕厥種子)’고 했다. 농부에게 종자는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이요 미래를 뜻한다.

이렇듯 중요한 종자를 둘러싸고 세계 각국이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기후변화와 환경파괴 등으로 지구상의 생명체가 매년 수만 종씩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는 가운데 다양한 유전자원을 선점하기 위한 ‘종자전쟁(Seed War)’이 치열하다.

종자전쟁의 양상은 이미 다수확·고품질(1단계)과 기능성·친환경(2단계)을 추구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미국, 유럽, 일본과 같은 종자 선진국들은 3T(정보기술·IT, 생명공학·BT, 나노공학·NT) 기술을 접목해 고부가가치의 신물질을 개발하는 ‘3차 종자전쟁’을 진행 중이다. 지난 100년을 ‘유전(油田)’이 주도했다면 새로운 100년은 ‘유전(遺傳)’이 주도하는 형국이다.

우리나라 종자전쟁의 선봉에는 농업진흥청 산하 농업유전자원센터가 있다. 종자계의 ‘한국은행’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현대판 ‘노아의 방주’를 방불케 한다. 식물종자, 식물영양체, 미생물, 동물 생식세포, 곤충 등 8000여종에 이르는 27만여점의 유전자원이 이곳에 보관돼 있다. 규모면에서 일본에 이어 세계 6위 수준이다. 2008년 국제식량기구(FAO)로부터 최첨단 시설과 안전성을 인정받아 ‘세계 종자 안전중복보존소’로 지정되면서 세계 각국의 유전자원도 함께 보관 중이다. 안전중복보존소로는 세계 최대 종자 저장고인 노르웨이 스발바르 섬 천연동굴(450만점)에 이어 두 번째다.

농업유전자원센터는 토종 및 재래종의 수집과 밀반출된 해외 유전자원의 반환을 통해 유전자원을 광범위하게 증식하고 있다. 이렇게 확보된 유전자원들은 특성 검정 과정을 거쳐 자원정보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뒤 냉장·냉동 보존된다. 보관 중인 유전자원들은 학계와 민간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되고 있다.

현재 국내 종자시장의 규모는 4억 달러 수준이다. 세계 시장의 1.1%에 불과하다. 특히 국제식물신품종보호동맹(UPOV)의 협약에 따라 신품종에 대한 지적재산권 보호가 강화되면서 매년 100억원 이상의 로열티가 국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종자 선진국에 비해 뒤늦게 ‘씨앗싸움터’에 뛰어든 탓이다.

하지만 ‘희망의 씨앗’은 존재한다. 농업유전자원센터 김정곤 소장은 “우리나라는 온·난·한대성 기후를 모두 갖고 있어 생물다양성이 동일 면적의 다른 나라보다 3∼4배나 높다”고 설명하며, 종자산업이 우수한 인력과 기술력을 갖춘 우리나라에 유리하다고 강조한다. 김 소장은 “10년 안에 일본을 넘어 세계 5위권 유전자원 강국에 진입할 것”이라는 말로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사진·글=곽경근 선임기자 kkkwa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