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정철훈] 살아 있다는 ‘뉘우스’

입력 2010-12-27 17:49


2010년 한국문학을 돌이켜보건대 어떤 작품이나 사건에 앞서 한 시인을 호명하게 된다. 시인 최승자(58). 올해의 작품으로 말하자면 고은 시인의 역작 ‘만인보’ 완간일 것이고, 사건으로 말하자면 황석영의 장편 ‘강남몽’ 표절 시비가 앞 순위겠지만 ‘정신병동으로 간 시인 최승자’ 앞에서 문단 안팎의 대소사는 ‘동작 그만’의 지경에 이른다.

10여년간 문단을 떠나 있던 그가 신작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을 펴낸 것은 1월 둘째 주였다. 시편들은 한결같이 ‘병중(病中)의 노래’이자 신음에 가까웠다. 시집을 곁에 두고 읽는 일은 괴로웠다. 그가 잠시 모습을 나타낸 건 11월 초, 대산문학상 수상작 발표 자리에서였다. 키 149㎝, 체중 34㎏. 피골상접한 중환자가 따로 없었다. 2000년 이후 그는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리며 고시원과 여관방을 전전했고 밥 대신 소주로 연명하며 정신분열증세를 앓았다. 죽음 직전에 유일한 혈육인 외삼촌이 포항으로 그를 데려가 입원시킨 게 2년 전이었다.

최승자가 누군가. 1980년대에 수많은 시인 지망생들은 그의 시에 열광했고 그의 시편에 담긴 세기말의 비망록 같은 비애와 허무를 흉내 내는 한 시절을 보냈으니, 그중에서도 젊은 여성시인들에게 그는 좌절과 질투의 다른 이름이었다. 후배 시인들이 이런저런 문학상을 수상하거나 대학교수가 되어 정년이 보장된 문인으로 거듭나는 동안, 최승자는 자학에 가까운 몸짓으로 3평짜리 고시원을 전전하며 그만의 심연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태워 유언처럼 시를 써온 그 앞에서 올 문단의 이슈를 열 개나 스무 개쯤 열거하는 것은 부질없다. 문학, 그리고 예술이 허무와 비극의 산고를 겪는다는 것은 불문율이지만 바닥까지 내려가면 바닥이 시인을 받아준다는 또 하나의 풍설마저 그에게 와서는 무참히 깨지고 만다. 바닥없는 허무의 심연이 그가 앓고 있는 병이었다. 그러다 간신히 시라는 동아줄을 움켜쥔 채 1주일에 두 번씩 병원을 찾는 외삼촌을 통해 지난해 가을, 출판사로 원고를 넘겼고 출판사는 어렵게 연결되는 시인과의 전화, 팩스, 편지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시집을 내놨다.

대산문학상 심사위원들은 그의 시집에 대해 “자기 언어 속으로 스스로를 의문사시키려고 하는 섬뜩함을 보이는 등 오랫동안의 고통스런 침묵을 깨고 다시 시적 언어의 빛나는 매력을 보여주었다”고 평했지만 문단 안팎에는 조금 다른 견해도 있었다. 달포 전, 최승자 시인의 오랜 문우이자 1980년대 문단의 한 축을 그와 함께 이끌었던 이성복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최 시인의 소식은 간간이 전해 듣고 있었다”면서도 정작 시집에 대해서는 “아무 할 말이 없다”며 무척 신중한 목소리였다.

“정신병동으로까지 우리 문학의 몸을 끌고 간 게 최승자가 아니겠느냐”며 운을 떼자 그는 “문학상에는 문학 외적인 격려와 위로의 차원도 있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자칫 시의 파괴가 우려된다는 게 제 개인적 의견이지요”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만큼 최 시인을 아낀다는 뜻과 함께 문학적 완결성 측면에서는 이번 시집이 다소 불만스럽다는 의미였다. 그의 지적처럼 최승자 시집이 올해의 최고 작품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역경과 고난이 의미하는 바, 우리는 최 시인처럼 자신의 불우를 온몸으로 견디며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뉘우스’(뉴스)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올 한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겪은 비극과 불우를 모두 떠올릴 필요조차 없이 지난 4월 천안함 사건 당시 우리 해군 장병들의 사체가 한 구 한 구 건져 올려지는 장면을 TV로 지켜보면서 죽음이란 남의 일이 아니며 이토록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렸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음 직전에 가까스로 살아남아 문단에 복귀한 최 시인처럼 ‘병중의 언어’로 “나는 아파서/ 그냥 병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참 우습다’)라고 유언처럼 중얼거릴지라도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에 대해 답해야 한다.

정철훈 문화과학부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