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홍사종] 싸우지 않고 살 순 없나
입력 2010-12-27 17:50
“훈련 재개로 손상된 국가 위신은 회복됐으니 이젠 전쟁 막는 지혜 찾아야”
싸움구경만큼 사람들의 심장을 쿵당거리게 하는 일이 있을까. 일단 치고받는 사람들을 관전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심정적으로 어느 한쪽 편에 서서 싸움을 보다 보면 사태가 엉뚱하게 돌변하기도 한다. 격해진 싸움판에서 구경꾼의 아드레날린이 보태지면 별것도 아닌 싸움은 사리분별이 애매해진 패싸움으로 옮겨간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살며 늘 ‘윗말’ ‘아랫말’ 패싸움에 동참했다. 동네 아이들의 패싸움은 별것도 아닌 명분을 만들어 그냥 싸운다. 때로는 애들 싸움이 격해지면 어른 싸움이 되기도 하는데 꼭 누구 하나 돌팔매로 머리가 깨져야 끝이 난다. 싸움의 참화를 눈으로 확인하고 느낄 때까지 ‘마을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한 우리 조무래기들의 전투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 짜릿한 분노와 흥분이 곁들인 싸움놀이는 사춘기까지 계속됐다.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지수가 최고로 높아진다는 이 시절에는 자주 싸움을 했다. 학우가 그냥 쳐다만 봤는데도 ‘째려봤다’고 시비를 걸기도 했고 시비를 당하기도 했는데, 눈이 찢어지고 입술이 터지고서야 자숙기가 찾아왔다.
어른이 되고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사회적 책임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의 규범과 법질서를 배운 나는 내 안에 존재하는 모든 욕구를 무의식 안에 가두고 통제했다. 이 고도로 억압된 자의식은 이따금 문화라는 고양된 이름으로 출구를 찾아 나섰다. 나는 전쟁과 인간의 분쟁을 다룬 문학작품들과 영화 연극 등을 통해 선악 싸움에서 언제나 선(善)의 편을 지향하는 내 안의 전투 에너지를 카타르시스해냈다.
요즈음 아이들은 동네 편싸움 대신 컴퓨터로 전쟁을 즐긴다. 나의 아들이 초등학교 시절에 몰입했던 스타크래프트, 시저2는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전쟁게임이다. 이성적 소강상태를 유지하는 평화 시에도 싸움놀이는 변형된 방법으로 계속될 뿐이다.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월드컵 축구도 따지고 보면 문명화된 국가들끼리 벌이는 전쟁과 다름 아니다. 서로 편을 나누어서 응원하다가 싸우기도 하는데, 1969년 남미의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는 축구경기 하다가 전쟁을 벌여 2100명이 전사하는 비극을 만들어냈다. 인간은 왜 이럴까.
“사람이 즐기는 최고 재미 중 하나가 싸움하는 겁니다.” 나의 자조적인 질문에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인 이명현 선생께서 위로하듯 답을 줬다. “사실 인간이 평화를 좋아하는 것 같지만 평화가 오래 계속되면 지루해하다가 싸울 거리를 찾아 나서지요. 세계가 늘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국회가 만날 저렇게 싸우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노(老)철학자의 말씀대로 인류의 장정에서 싸움질을 빼면 설명할 알맹이가 별로 없다.
전쟁의 명분이 당대에서는 정의였다지만, 역사로 돌이켜 보면 별것 아닌 일로 사람들은 애꿎은 목숨을 버린다. 아이들 싸움이나 어른 싸움이나 무모한 건 큰 차이 없다. 참혹한 후유증이 목도될 때까지 인간은 싸움과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 문제는 오늘날 전쟁이 지난 전쟁과 달리 대공멸의 참화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에 접한 나의 생각은 도발자들을 철저히 응징하는 것이었다. 전면전으로 비화될지 모르는 위험에도 내 조국의 주권을 위정자들이 지켜내지 못함에 분개했다. 정상국가라고 말할 수 없는 북한과 한바탕 싸우기를 바랐던 것이 순간의 내 생각이었다. 분노는 결과의 처절한 참상과 비극을 논하는 것조차 가린다. 그러나 이 분노의 껍질을 한 겹 벗겨내고 멀리 더 큰 세상을 내다보면 어떤 생각을 도출해 낼 수 있을까.
주요 20개국(G20) 행사를 치른 우리는 이제 세계인의 선망을 받는 책임 있는 국가로 우뚝 섰다고 자임하고 있다. 연평도 사격훈련의 실시로 손상된 국가의 위신은 회복됐다. 그렇다면 이제 성숙되고 고양된 문화의식으로 공멸로 가는 전쟁을 막는 지혜를 찾아야 할 때다. 혹 우리가 아직도 ‘마을의 명예와 자존심’만을 붙들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쯤 크게 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홍사종 미래상상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