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손수호] 종군기자 최병우

입력 2010-12-27 17:49

북한의 연평도 포격 이후 갑자기 부각된 곳이 금문도였다. 대만령이면서도 대륙과 불과 2㎞ 떨어져 있는 요충지다. 섬의 크기는 동서 20㎞, 남북 길이 5∼10㎞. 섬 전체에 굴을 파서 그물망처럼 연결했으니 그런 요새가 없다. 중공군이 1958년 8월 23일부터 1979년까지 21년간 포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연평도를 금문도처럼 만들자는 주장은 초기에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우리 군의 금문도 방문 계획이 나온 것도 연평도 요새화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공회대 김명호 교수 등 중국 전문가들이 금문도를 둘러싼 당시의 전황을 소상히 공개하면서 계획은 슬그머니 철회됐다. 중공의 금문도 공격은 미국의 중동전략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고, 중공과 대만 간에 포격 날짜를 공유한 자료까지 공개됐다. 금문도는 우리의 모범답안이 아니라는 사실이 자명해졌기에 닭 쫓던 개 신세가 됐다.

그렇다고 금문도를 영 잊을 일은 아니다. 최병우(1924∼1958) 기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금문도 취재 도중 사망한 광복 후 최초의 종군기자였다. 한국은행에 근무하다가 보스 장기영의 권유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 놓은 그는 1958년 7월 인도네시아 내란을 취재한 뒤 중국과 대만 사이에 공방이 한창이던 대만해협에 뛰어들었다. 그해 9월 11일 금문도에 들어가 취재하다 지프차 전복사고로 다쳐 타이베이로 후송됐다가 아픈 몸을 이끌고 26일 재차 상륙을 시도하다 동료 외국인 기자 여섯 명과 함께 실종됐다. 당시 나이는 34세, 직책은 코리아타임스 편집국장 겸 한국일보 논설위원이었다.

그의 기자생활은 5∼6년으로 짧았지만 늘 현장을 중시했다. 입버릇처럼 한 말이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외국인 기자가 17명이나 되는데 한국 기자는 한 명도 없어 부끄럽다”는 것이었다. 관훈클럽은 그의 기자정신을 잇기 위해 1989년에 ‘최병우 국제보도상’을 제정해 해마다 국제뉴스 보도 부문에서 공적을 세운 언론인을 시상하고 있다.

서구 언론은 요즘 “전쟁 취재에 목숨 걸 가치가 있느냐”는 회의론을 펼친다고 한다. 어이없는 죽음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기자들은 사격훈련을 하는 연평도를 떠나지 않았다. 북한이 격파하겠다며 위협한 애기봉 성탄트리 점등식 때도 캐럴을 합창하는 성도들과 함께 있었다. 위험에 견줄 만한 보도 가치가 있다고 보았기에 그러했다. 52년 전의 최병우 기자가 그랬던 것처럼.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