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수지 (2) 불쑥 찾아온 정신 질환자 상담 후 호전
입력 2010-12-27 17:57
1982년 8월 무더운 오후였다. 연구실에서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바깥이 몹시 소란스러웠다.
“안 됩니다.”
“왜 안 됩니까?”
문밖에서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남자가 연구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순간 지독한 땀 냄새가 코를 푹푹 찔러왔다. 그 남자는 한여름인데 겨울 점퍼 차림에 머리는 헝클어졌고,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던 정신분열증 환자 중 한 사람이었다.
“좀 앉으세요.”
나는 차가운 물을 가져다 줬다. 그는 단숨에 물 두 잔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휴우”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선생님, 우리가 퇴원한 후 사회에서 얼마나 살기 힘든지 아세요?”
그는 따지듯이 목소리를 높여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길을 가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해대고, 갈 곳은 없고, 직장도 못 나오게 하고, 집에서는 쉬쉬하고, 부모님은 저 때문에 싸우고…. 이게 결국 우리더러 죽으라는 얘기 아닙니까?”
나는 잠자코 그의 얘기를 들었다.
“선생님은 왜 병원에서만 환자를 봅니까? 길거리에 나가면 나 같은 미친 사람이 많은데 왜 병원에 노는 사람만 보느냐고요? 병원에도 못가는 돈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건강보험이 없던 시절, 입원치료를 받던 정신과 환자가 일단 퇴원을 하면 추후관리 제도가 없어 길거리를 배회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던 상황에서 그의 항변은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이었다.
“듣고 보니 당신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저도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대뜸 제안을 했다.
”제가 토요일마다 와도 됩니까?”
이렇게 그와 12주간의 상담계약을 했다. 매주 토요일 오후 3시에 오되 내가 내주는 숙제, 특히 ‘약을 꼭 먹는다’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달았다.
그는 3개월 동안 매주 토요일 3시면 내 연구실에 나타났다. 나는 우선 생활에 관한 것부터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12년간이나 병원을 들락날락거리며 살아온 터라 생활 훈련이 전혀 돼 있지 않았다. 첫 주에 내가 내 준 숙제는 다음과 같았다. ‘아침 6시에 무조건 일어난다.’ ‘자기 이불은 자기가 갠다.’ ‘어머니가 시키기 전에 먼저 세수하고 머리 빗고 용모를 단정히 한다.’
이런 훈련을 매일하고 그 결과를 체크해 오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숙제를 너무 잘해왔다. 다음은 언어 훈련이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도록 훈련시켰다. 만성 정신질환자들은 일상적인 인사나 고맙다는 말을 잘 못하기 때문이다.
상담을 시작한 지 4주째가 될 무렵 그의 어머니라는 분이 전화를 했다. 어머니는 울먹였다.
“세상에, 우리 아들이 오늘 아침 밥상에 앉아 내게 처음으로 ‘밥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했어요. 제가 목이 메어 밥을 먹지 못했답니다.”
매일 “왜 나를 낳았어?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엄마 때문이야”라며 늘 엄마에게 화를 내던 아들이 너무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아들이 고맙다고 하면 ‘네가 그런 말을 하니 엄마가 너무 기뻐’라고 격려하면 더 좋아질 거예요”라고 말해 줬다. 환자 혼자 노력할 때보다 가족이 함께 노력할 때의 치료 효과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