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군으로 포장된 전제군주?… 두얼굴 英祖
입력 2010-12-27 20:48
김백철 교수 ‘천의소감’ 분석
그는 당파색을 일신하고 민생을 살핀 성군이었을까, 혹은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척결하고 아들까지 죽인 독재자였을까. 조선 21대 왕 영조(1694∼1776, 재위 1724∼1776)대 탕평(蕩平)정치의 이면을 분석한 연구가 나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영조시대 ‘역적토벌 경과보고서’ 격인 ‘천의소감(闡義昭鑑)’을 처음으로 정치적·국어학적·서지적 측면에서 종합분석해 계간지 ‘정신문화연구’ 겨울호에 실었다.
영조는 일평생 끊이지 않는 역모사건에 시달렸던 인물이다. 노론의 일방적 지지로 왕세제(王世弟·왕위를 이어받을 왕의 아우)에 책봉된 데다 병상의 이복형 경종에게 상극으로 통하는 음식인 게장과 생감을 올린 일이 구설에 올랐기 때문이다. 경종이 일찍 죽자, 왕세제에 반대했던 소론 강경파들은 ‘연잉군(왕자시절 영조의 군호)이 상감을 독살했다’고 주장하며 세제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자연 정통성은 취약했고, 왕권이 자리 잡을 수 있는가는 국왕의 정치력에 달린 일일 수밖에 없었다.
김백철 전북대 HK교수(인문한국 전임 교원)는 영조가 수십 년에 걸쳐 탕평을 명분으로 왕권을 확립하고 전제군주로 군림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며 일반의 상식인 ‘노론 일당독재론’은 배격했다. 김 교수는 “영조가 노론의 일당독재를 허용하고 소론의 지지를 받던 사도세자를 죽였다는 상식은 이덕일의 역사소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탕평이 필요했던 이유는 국왕이 정치 난맥을 타개하기 위해 집권세력을 교체하고 반대당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했던 이전 환국(換局)정치의 폐단을 노론과 소론, 임금 할 것 없이 모두 공감했기 때문이다. 1724년 31세의 나이로 즉위한 영조는 몇 차례의 역모사건을 겪으면서도 30여년 동안 인내심을 발휘하며 노론과 소론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힘썼다. 14대 선조 이래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진 붕당 체제가 서서히 완화되며 왕권은 점점 강해졌다. 왕권을 토대로 균역법 등 개혁정책도 실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1755년 2월 나주 괘서사건과 5월의 심정연 시권사건, 즉 ‘을해옥사(乙亥獄事)’를 겪으며 영조는 무자비한 전제군주로 돌변한다. 나주 괘서사건이란 나주의 객사에 ‘조정엔 간신이 가득 차고 민은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의 글이 붙은 일을 일컫고, 심정연 시권사건이란 과거시험에서 왕과 조정을 비난하는 투서가 나온 일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88명이 처형됐고 500여명이 처벌을 받았다. 역적이라 단죄된 김일경의 경우 종손까지 죽었다. 왕은 역모 혐의를 받은 이들의 목을 베어 효수하고 신하들에게 조리돌리기까지 했다.
인내심 강한 탕평의 군주였던 임금이 왜 이렇게 변했는가? 김 교수는 “영조가 예상외로 오래 살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재위 31년인 이즈음 영조보다 오랜 경험을 가진 신하들은 거의 다 죽고 영조의 측근이라 할 만한 동년배들도 조정에서 사라져가고 있었으므로 남은 것은 왕보다 한참 어린 사람들뿐이었다. 자연 왕을 견제할 만한 세력이 조정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강력한 독재자인 군왕에게 도전할 수 있는 권위는 없어졌다.
사도세자의 죽음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된다. 삼사의 언론기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되자 명분과 절의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세자를 새로운 희망으로 삼고 의지했다. 하지만 영조는 이미 2인자나 견제세력을 용납하지 않았던 상황. 마침내 임금은 하나뿐인 아들까지 죽음으로 내몬다(재위 38년). 흔히 임오화변의 원인을 노론과 소론의 대결구도에서 찾지만, 실제로는 아첨꾼들만 살아남은 정국에서 국왕의 전횡에 비판적이던 청류들이 세자에게 희망을 걸었던 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실제 사도세자 보호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이천보 박문수 조재호 채제공 등 노론·소론·남인을 망라했다.
탕평정치는 영조·정조 등 유능한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에는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조선의 암흑을 가져온 세도정치는 탕평파에서 비롯되었으니, 영조가 그토록 혐오했던 붕당도 상호 견제라는 선기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제적인 탕평으로 붕당이 힘을 잃고 왕권에 대한 견제기능이 사라진 뒤, 11세의 나이로 순조가 즉위했을 때 왕권을 대신한 외척 안동김씨를 견제할 사람은 조정에 없었다. 이른바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는 흥선대원군이 집권할 때까지 반세기 이상 지속됐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