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예수는 누구인가
입력 2010-12-26 17:39
(26) 예루살렘 성전 도착
신학박사인 선배가 교회를 맡아 목회하게 되었다고 이메일이 왔다.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에서 있었던 얘기를 써왔다. 교회 성도 가운데 국가 고위직에 취임하신 분이 있었다. 보통은 ‘…취임 감사예배’라고 제목을 붙여서 예배를 드린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예배란 형식을 통해 일이나 사람을 축하하는 일이 있는데 그럴 때 예배학적으로 ‘감사’란 말을 붙여야 한단다. 예배는 본디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고 예배에서 하나님 한 분만 영광을 받으셔야 하니까. ‘…취임 축하예배’라고 하면 잘못이 된다. 학위 취득은 ‘박사학위 취득 감사예배’, 총회장이 되면 ‘총회장 당선 감사예배’, 이런 식이어야 한다.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무던히도 고집스럽게 본질을 좇는 선배 얘기다. 고위직에 취임한 분을 중심으로 취임 감사예배를 드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런 종류의 예배가 명칭만 ‘감사예배’지 사실은 사람이 중심이 되는 ‘축하파티’다. 하나님께 송구스럽고 낯 뜨겁다. 축하나 축가, 권면이나 감사 인사 등 예배 순서를 맡은 사람들 말이 교회 예식의 거룩한 표현에 능숙하지만 까놓고 보면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드리는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다. 영광을 받는 예배의 주인공, 순서 맡은 사람들, 참석한 사람들 모두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를 인간의 이해관계에 이용해 먹으면서 공범이 된다.
이메일을 읽으면서 선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을까 눈에 선하다. 선배의 기질로 봐서 충분히 그랬으리라. 한국 교회 신앙의 타락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기준 저하를 그토록 안타까워하는 사람이니까, 목회 현장에 나가서 부딪히는 게 얼마나 많을까. 나야 신앙생활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독교에 대해 깊이는 모르지만 일반 종교 현상에서 종교인이 타락하는 과정은 거의 비슷하다. 대학교 역사학 강의 시간에 종교집단의 태동과 발전, 타락에 대해 들었던 내용이 떠올랐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면서 참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분, 시골 아저씨 같아서 학생들하고 친구처럼 지내시던 분, 가끔 청소하는 분들과 무슨 얘기인지 오랫동안 앉아서 시간을 보내시던 교수님이었다. 역사를 사람의 심성 구조, 사회의 구조 변화와 연결하여 해석하는 분이셨다.
선배가 고위직에 취임하신 성도에게 얘기한 방법은 기도 모임이었다. 신앙인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은 분명하다. 주중의 어느 예배 시간에 고위직의 성도가 자신의 삶과 신앙에 대해 간증하고, 간증 후 참석한 성도 모두 그분을 위해 20분 정도 진지하게 중보기도를 드렸다는 것이다. 참 멋진 방법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길 마지막에서 성전에 이르렀다. 성전에서 예수가 주목한 것은 예배였다. 마가복음 11장 17절이 이렇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기도하는 집이란 다른 말로 예배 드리는 집이란 뜻이다.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시는 예배가 성전의 존재 이유다. 창조된 사람의 본디 모습은 예배자요, 타락은 예배자이기를 거부한 것이요, 타락의 회복이 구원인데 구원은 예배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어느 책의 구절이 생각났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예배자의 모습이 무엇인지 보여주려고 오신 분이 된다. 예수의 길은 예배자의 길이다.
지형은 목사 <성락성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