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밀명받은 ‘옥새 장인’ 3대의 운명… 재독 작가 강유일 ‘황제의 칼데라’
입력 2010-12-24 17:36
한국 소설이 세계문학의 창을 두드린다면 이 작품을 빼놓을 수 없겠다 싶은 게 최근 출간된 재독 작가 강유일(57·라이프치히대학 교수·사진)의 장편 ‘황제의 칼데라’(문학동네)이다. 그만큼 이 소설은 세계지향적인 풍모를 갖추고 있다.
함부르크, 런던, 뉴욕, 샌프란시스코, 상하이, 시안, 홍콩, 키토, 그리고 남태평양 적도 부근의 섬 갈라파고스…. 이 지명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작가가 이 작품을 위해 틈틈이 취재 여행을 갔던 장소다. 세계 각처에 산재되어 있는 이 장소들은 20세기가 탄생시킨 ‘불과 폭력의 역사’를 압축해 놓은 지점이자 소설의 공간적 배경으로 자리 잡는다.
소설 제목 ‘황제의 칼데라’에서 ‘황제’는 구한말 비운의 왕이었던 고종을 지칭하며 ‘칼데라’는 에스파냐어에서 기원한 ‘연못’이라는 뜻이다. 경복궁 대화재로 소실된 옥새를 고종이 복원한 뒤 일제에 강탈당하는 것을 우려해 경회루 연못 속에 은밀히 숨겨놓았을 것이라는 가상의 시나리오가 소설의 중심 가닥이다. 이런 설정은 작가가 다녔던 서울 진명여고 설립자가 고종의 계비(繼妃)인 엄비(嚴妃)였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재학 시절, 교장실에 걸려있는 사진 속 엄비의 모습을 기억해낸 작가는 한국을 찾을 때마다 여학교 시절의 통학 코스를 다시 걸으며 20세기에 좌초한 왕국의 비사를 세계적 차원으로 확장시킨 소설을 구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고종의 밀명을 받은 옥새 장인 우숭린, 그의 아들 현학, 손자 난세로 이어지는 불운의 3대를 소설에서 탄생시킨다.
작가의 번뜩이는 기지는 소설 도입부에 1961년 5월 부친과 함께 서울에서 서독으로 망명한 손자 난세의 현재적 상황을 배치함으로서 이 소설이 흘러간 역사에서 스스로 걸어나와 바로 지금의 이야기로 살아 움직이게 했다는 데 있다.
“생일엔 날 낯선 도시에 내던지고 싶었다. 탄생이란 사건을 통해 내가 경험했던, 이 우주에 내팽개쳐짐, 그 신성한 낯섦이라는 황홀한 저주를 마시고 싶었다. 내 존재에 통절하게 새겨진 이방인의 문신. 어떻든 생일엔 이런 엑소더스가 좋다.”(15쪽)
소설 속에서 독일 지방법원 부장판사로 그려지는 난세의 이 독백은 역사의 조난자인 고종 황제와 황제의 전사였던 옥새장 가문의 3대에 걸친 망명과 객사, 그 처절하고도 찬란한 좌초를 함축하는 비명인 동시에 이 소설이 역사 시대에서 빠져나와 탈역사 시대의 신화로 거듭나는 목소리임을 우회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