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묵으로 살아온 서생 사람의 길을 일러주다… 문병란 시집 ‘금요일의 노래’
입력 2010-12-24 17:36
1935년 갑술생인 문병란(75·사진) 시인의 신작 시집 ‘금요일의 노래’(일원서각)는 그의 띠에서 연상되는 바, 개의 짖음에서 출발한다.
“나는 떠돌이개/족보는 있었지만 나는/그 문중을 버렸다-진돗개 2대 잡종//나는 바람의 형제/구름의 자매/산봉우리에 올라/달을 보고 짖는다-무주공산/저 산을 보고 짖는다//이리나 호랑이 맞수는 아니나/그래도 겨뤄볼 만한 용기/어느 족보 어느 반열이 아니어도/나는 견권(犬權)을 내세워 짖을 줄을 안다”(‘떠돌이 개의 노래’ 일부)
10년 전 조선대를 정년퇴임하고 광주광역시 무등산 아래 지산동에서 서은문학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자신이 태어난 가문을 떠나 한 마리 떠돌이 개가 되어 짖는다는 행위 자체가 시인의 운명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는 어떤 가문 출신인가.
“할아버지는/최면암 선생의 도끼를 간직했다/아버지는/안중근 의사의 육혈포를 자랑했다/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서/훈장이 된 나는/도끼와 권총 대신 백묵을 들고 있다”(‘역사’ 일부)
도끼와 육혈포가 할아버지와 아버지 시대에 항일의 무기였다면 그 자손인 시인의 무기는 백묵인 것이다. 무엇을 쪼갤 수도, 무엇을 쏠 수도 없는 백묵 서생으로서 후학을 가르치며 평생을 살아온 그는 칠순을 넘었으되 도끼와 육혈포를 든 선대의 마음보다 더욱 비장하다. 백묵은 도끼와 육혈포가 지니지 못한 또 다른 내면, 즉 인생의 질문에 문자로 답해야 한다는 문학인의 내면을 갖는다.
“소설가 C씨가 전활 했다/타락할까봐 오래 살기 무섭다/70살이 되는 날 아침/나도 타락할까봐 세상이 무섭다/(중략)/소설가 C씨가 다시 전활 했다/타락할까봐 사랑하기가 무섭다/70살이 되는 날 아침/나도 시 쓰기가 무섭다”(‘고희’ 일부)
그는 다형 김현승(1913∼75) 이래 전남 시문학의 한 지형도를 그려온 시인이었다. 젊은 시절엔 저항문학에 몰두하면서 시집이 판금조치 당했고 광주민주화운동 배후 조종자로 수배·투옥되는 등 역사성과 민중성을 통해 민족민중문학을 건설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런 그가 이제 칠순을 넘겨 서정의 하늘 아래에서 ‘사람의 길’에 대해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그 길이란 ‘우리는 모두 늙는다’라는 만고불변의 외길이다. 시심이란 따로 있는 마음이 아니라 태어나 한번도 바깥으로 나간 적 없는 상념들의 발로임을 새삼 깨닫게 되는 건 이 시집을 읽는 색다른 묘미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