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20세기, 왜 살육 광풍 몰아쳤나
입력 2010-12-23 17:46
‘증오의 세기’ 니얼 퍼거슨/민음사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살육의 시대’였다. 두 차례 세계 대전에서 7000만 명에 가까운 인명피해가 나는 등 20세기에 발생한 전쟁과 인종 청소 등으로 사망한 사람은 모두 1억6700만∼1억8800만 명으로 추정된다. 반면 같은 시기 인류는 전례 없는 진보의 시대를 맞았다. 인류의 평균 수입이 치솟았다. 의학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질병의 고통에서 점차 해방됐고 몸집이 커졌으며 수명은 30세 가까이 연장됐다. 이처럼 눈부신 진보를 달성한 시대에 인류는 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였을까?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2005년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로부터 ‘최고 지성 100인’으로 선정된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역사학 교수가 20세기에 벌어진 조직적 폭력을 통찰한 책 ‘증오의 세기’가 나왔다. 근대 제국주의에 관한 정통 학설에 도전한 수정주의 역사가로 유명한 만큼 저자는 20세기의 잔혹성을 기존 사관과 다른 시각에서 샅샅이 파헤치고 분석한다. 그는 910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걸쳐 경제와 사회, 과학, 철학 등의 영역을 넘나들며 동시대인들의 시각에서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서술한다. 특히 1940년대 초와 같은 특정한 시기와 중유럽, 동유럽, 만주, 한국 등 특정한 장소에서 폭력 사건들이 다수 발생한 이유를 인종과 민족 갈등, 경제적 변동성, 제국의 쇠퇴 등 세 가지로 설명한다. 그는 또 1990년대 냉전이 끝나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예견하며 선언한 ‘역사의 종언’을 전면으로 부정한다. 1500년 이후 4세기 동안 무너졌던 동서양의 균형이 제국의 쇠퇴를 기점으로 회복된 것일 뿐이지 평화가 정착됐다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다.
니얼 퍼거슨은 책에서 초지일관 과거의 교훈으로부터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만약 20세기 역사가 지침이라면, 서로 다른 민족집단이 같은 언어를 공유하며 평화롭게 통합돼 있는 곳에서도 이 연약한 문명체계가 급속히 무너질 수 있다”는 그의 경고는 쇠퇴하는 제국인 미국과 급부상하는 제국인 중국의 틈바구니에 끼인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