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방 있습니까’ 30년 연속 주인공 덕구 역 박재련 극단 ‘증언’ 대표
입력 2010-12-23 18:37
“요셉, 마리아. 빈∼방 있어요…우리 집에 빈 방이 있어요. 마구간에 가지 마세요….”
여관 주인 덕구가 눈물 콧물 범벅을 하고는 어눌한 말로 만삭의 마리아를 안타깝게 부른다. 아기 예수는 곧 태어날 텐데, 이 추운 겨울 예수가 편히 쉴 수 있는 따뜻한 방 한 칸이 없다. 그 모습을 본 ‘지진아 덕구’는 급기야 극과 현실을 헷갈리며 ‘우리 집’, 자신의 빈 방으로 예수를 모시겠다며 절규한다.
해마다 12월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극단 증언의 연극 ‘빈 방 있습니까’의 한 장면이다. 1981년 12월 21∼23일 민예소극장에서 처음 무대에 올려진 이래 한 해도 쉬지 않았다. 교회들에서도 성탄절 전후로 자체 공연하는 등 크리스천이라면 한번쯤 ‘빈 방’을 봤을 정도로, 최고의 성탄극으로 꼽힌다. 올해는 극단 증언의 창단 30주년 및 ‘빈 방’ 30년 연속 공연 기념으로 지난 16일 막을 올렸다.
“요즘 자기 것(방)을 내어 주겠다고 덕구처럼 쉽게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처음엔 바보 같은 덕구를 보며 웃다가, 안타까워하다가, 어느 순간 울컥합니다.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자연스레 덕구의 순수한 마음에 동화되지요. 그래서 꾸준히 덕구를 찾는 게 아닐까요?”
증언 대표이자 주인공 덕구로 열연 중인 박재련(58·동숭교회) 장로의 얘기다. 28세 때 처음 덕구를 만나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이 된 지금까지 그는 여전히 고교생 덕구로 살고 있다. 최근 서울 여의도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박 장로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해맑게 웃는 모습이 마치 덕구 같았다.
“제가 욕심을 부린 거지요.”
30년 동안 덕구를 고집한 이유에 대한 답은 다소 의외였다. 사실 몇 번 다른 배우에게 덕구를 맡기려고도 했다. 연극계에서 작품이 좋다고 소문이 나자 덕구를 해보겠다는 배우들이 찾아왔던 것. 그러나 연기는 잘 하지만 배우들의 신앙이 없다 보니 감동이 덜했다. 박 장로는 “헌신이 필요한 덕구이기에 역을 맡기는 게 쉽지 않았다”면서도 “언제든 믿음으로 준비된 후배가 있으면 덕구를 보내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빈 방’은 미국에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극화한 작품이다. 연출가 겸 ‘빈 방’에서 교사 역을 맡은 최종률(동숭교회) 장로가 대본을 썼다. 70년대 중반, 교회에서 연극으로 봉사하면서 박 장로는 최 장로를 알게 됐다. 이들은 전문 선교극단을 만들어 복음을 전하자며 80년 극단 증언을 창단했다. 12월 대학로에서 한 정기공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비량으로 무료 위문공연을 다닌다. 단원들도 서울공연예술고 교장인 박 장로를 비롯, 목회자 교수 회사원 간호사 사업가들로 다양하다. 영화배우 강신일씨를 비롯해 드라마 작가 이선미씨, 성우 정옥주씨 등이 창단 멤버로 오랫동안 활동했고 배우 유오성 김미경 정선일 서태화 박노식씨 등이 객원으로 출연했다.
30년이라는 긴 역사만큼 ‘빈 방’은 에피소드도 풍성하다. 제목만 보고 야한 작품인 줄 알고 찾아온 남성들이 나중에는 엉엉 울면서 “감동적인 작품”이라며 가족과 함께 다시 보러 온 적도 있다. 이혼을 결심한 한 어머니는 자녀들과 마지막 성탄절을 함께 보내기로 결심하고 거리를 헤매다 우연히 ‘빈 방’을 보게 됐고, 후에 “덕구를 보며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었다. 남편과 화해해 지금 열심히 살고 있다”며 메일을 보내오기도 했다. 장애인과 군부대, 해외 공연을 통해 외롭고 힘든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해줬다.
박 장로도 ‘빈 방’을 하면서 큰 은혜를 경험했다. 옆에서 늘 힘이 되어주는 아내를 만난 건 최고의 축복이다. 한번은 비염이 심해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해 덕구를 연기할 수 없었다. 그는 수술보다 진통제를 처방 받아 ‘빈 방’부터 강행했다. 그렇게 연기하는 동안 비염은 완치됐다.
96년 서울공연예술고(당시는 은일여자정보산업고) 교감으로 옮기면서 학내 분규로 몸살을 앓던 학교를 정상화시킨 적도 있다. 이후 교장이 되고 2008년 특목고로 전환하면서 서울 궁동으로 학교를 이전한 뒤의 일은 특히 잊을 수 없다. 학교 건축 과정에서 업체와 시행사 간 문제로 소송까지 당하는 와중에도 덕구역에 열중한 끝에 모든 게 협력해 선을 이루는 ‘기적’을 겪었다.
“제가 병이라도 걸리고, 사고라도 당했어봐요. 또 교사가 아닌 직장인이라면 어떻게 연극을 할 수 있었겠어요. 30년 동안 하나님은 저에게 적어도 12월에는 연극 외에 다른 것을 하지 말라고 이처럼 평안한 삶을 허락하신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저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지난해보다 올해 덕구는 살이 많이 빠졌다. 이젠 가발도 쓴다. 내년 12월엔 ‘빈 방’ 뮤지컬도 만날지 모른다. 그렇게 한 해 한 해 덕구는 변하겠지만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는 한결같다.
“2000년 전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를 위해 당신은 ‘빈 방’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빈 방’은 분명 이 시대 사랑과 감동을 전하는 성탄 카드다. 연극 ‘빈 방 있습니까’는 서울 대학로 문화공간 엘림에서 다음달 2일까지 계속된다. 이어 7일부터 2월 2일까지 미주 순회 공연도 갖는다.
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