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의자 … 거기에 내 의자는 아직 없다
입력 2010-12-23 18:02
2000년대의 홍대문화와 카페문화를 얘기할 때 빼놓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다. ‘홍대 골목대장’ 김명한(59)이다. “홍대 앞에서 논 지 30년”이라는 그는 1991년 주택을 개조한 카페 ‘아지오’를 열어 카페문화의 전성기를 맨 앞에서 이끌었다. 카페 10여개를 소유한 사장이자 서울시내 이름난 카페들의 숨은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그는 “카페는 현대 도시문화의 핵심”이라고 믿는다.
2007년 그는 홍대 앞에 또 하나의 카페를 선보였다. ‘aA디자인뮤지엄’이라는 이 카페는 일주일만 지나도 유행이 바뀐다는 홍대 앞에서 여전히 가장 멋진 공간 중 하나로 꼽힌다.
카페는 커피나 음식만 제공하는 곳이 아니라 수준 높은 디자인 미학을 경험하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 속에 담겼고, 이 생각은 근래 생겨나는 카페들 사이에 일반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aA디자인뮤지엄’은 이름처럼 본래 박물관으로 지어졌다. 1층 카페 공간을 제외하면 지하 2층부터 지상 4층까지 모두 의자로 채워져 있다. 국내 유일의 의자박물관이다.
“의자는 손님들에겐 구경거리요, 학생이나 디자이너들에게는 자료이고, 나 개인에게는 취미입니다.”
그는 소문난 컬렉터다. 20여년 세계를 돌며 가구, 그 중에도 의자를 집중적으로 수집해 왔다. 소장품이 1만여점 된다. 카페로 번 돈을 고스란히 의자 컬렉션에 털어 넣었다. 김 대표는 “내 스승이자 멘토인 일본의 오다 노리츠쿠를 제외하면 세계적으로도 나만큼 의자를 많이 소장한 컬렉터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191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 시대의 획을 그은 작품이라면 90% 정도는 다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의자는 작은 건축이죠. 조형적으로 완벽하고, 시대성도 담겨 있어요. 또 아무리 커도 인간의 키를 넘지 않고.”
새해 나이 육십이 돼서 그가 또 한 가지 일을 벌인다. 홍대문화, 카페문화의 아이콘이 된 aA 브랜드로 가구를 만들어 팔겠다는 것이다.
“국내외 유명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하고 숙련된 장인들이 만드는 가구를 평범한 시민들이 생활 속에서 소비할 수 있도록 합리적인 가격에 공급할 겁니다.”
그는 “20여년 준비해온 필생의 프로젝트”라며 “aA를 한국형 무지로 만들어 보겠다”고 덧붙였다.
일본의 생활용품 브랜드 무지(MUJI)는 유니클로(UNIQLO), 자라(ZARA) 등과 함께 세계시장을 휩쓸고 있는 ‘저가혁명’의 주역이다. 가구와 부엌용품에서 시작해 패션, 식음료, 화장품 등으로 확장되고 있는 무지의 제품들은 미니멀리즘을 핵심으로 하는 일본 디자인의 맛을 살리면서도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해 세계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90년대에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고 나서 사람들의 디자인 감수성이 굉장히 높아졌어요. 인터넷 때문에 정보도 많고 아는 것도 많죠.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 안목과 정보, 경제력을 가지고 직접 자기 집을 구성하고 싶어 해요. 그런데 사려고 보니까 정작 가구가 없는 거예요. 너무 비싸거나 마음에 안 들거나, 둘 중 하나죠.”
그는 카페를 하면서 사람을 공부했고, 컬렉션을 하면서 디자인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명품에 열광하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 아이폰을 찾는 요즘 젊은이들을 비판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물건, 유명한 제품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욕망과 실용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소시키는 것이야말로 디자인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의자 하나를 수억원씩 주고 수집하는 그가 “카페도 그렇고 가구도 그렇고 나의 기준은 늘 연봉 3000만원대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물건을 만드는 게 좋은 디자인이라고 믿는다”고 말하는 이유도 거기 있다.
컬렉터의 인생이란 박물관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는 한 걸음 더 나간다.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물건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서 소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좋은 브랜드, 좋은 물건을 만드는 게 늘 기업가들은 아니다. 종종 마니아나 예술가가 만들어낸다. 패션 명품과 아웃도어 브랜드, 벤처기업 등에서 그런 사례는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그는 가구를 수집하고 공부하는 동시에 브랜드를 준비해 왔다고 한다. aA라는 이름으로 카페와 박물관을 만들었고, ‘캐비닛’이라는 리빙 디자인 잡지를 발행해 왔다. aA는 어느새 일정한 팬과 문화를 거느린 브랜드가 됐다. 그 브랜드에는 홍대문화의 아이콘이라는 상징, 디자인에 대한 감각, 그리고 무엇보다 가구에 홀려 평생을 살아온 김명한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나를 알거나 aA를 경험해본 사람들이라면, aA에서 나오는 건 분명 오리지널일 거야, 그이라면, 거기라면, 적어도 카피는 안 할 거야,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는 내년 4월 aA디자인뮤지엄을 통해 오랫동안 준비해온 식탁, 의자, 소파 등을 공개한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구 매장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장은 벌써 몇 년 전에 차려놓았고, 시제품도 꾸준히 만들어 왔다. 삼청동에 짓는 aA디자인뮤지엄 2호점 공사도 마무리 단계다.
“평생 홍대 앞에서 장사를 했어요. 그동안은 생존을 위한 비즈니스였죠. 지금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비즈니스를 시작하는 거죠. 새해가 정말 기대돼요.”
무지 매장은 요즘 결혼하는 커플들이 가구를 장만할 때면 한 번씩 들러보는 곳이 됐다. 나무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심플한 디자인의 가구들이 젊은 부부들 눈길을 잡는다. 그런데 가격대가 아슬아슬하다. 유럽 명품가구보다는 편안한 가격이지만 선뜻 사기엔 여전히 부담스럽다. 그는 이 틈을 노리고 있다.
“가구에 관한 식견은 세계 누구에게도 꿀리고 싶지 않아요. 무엇보다 우리 무기는 가격이에요. 마진과 비용을 최소화해서 무지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제품을 내놓을 겁니다. 식탁은 100만원 안팎, 의자는 10만∼20만원, 이런 식으로 가격을 먼저 정해놓고 디자인을 하고 있어요.”
글로벌 기업 무지와 맞서겠다는 홍대 골목대장의 당찬 선언. 새해 흥미로운 도전이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