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척하는 북한 상대 모르는 남한 ‘치킨게임’의 재구성
입력 2010-12-23 18:00
요즘 한국 치킨은 ‘통 큰’ 녀석이지만 미국에선 오래전부터 ‘겁쟁이’였다. ‘chicken’은 속어로 겁쟁이란 뜻을 갖고 있다.
영화 ‘이유 없는 반항’에서 짐(제임스 딘)은 라이벌인 버즈와 나란히 차를 몰고 해안 절벽을 향해 질주한다. 절벽 아래로 떨어질까 두려워 먼저 차에서 뛰어내리는 쪽이 지는 담력 시합. 짐은 절벽 끝에서 멈춰 서지만 끝까지 버틴 버즈는 추락하고 만다.
이 장면은 1950년대 미국 젊은이들의 ‘치킨게임’을 변형한 것이다. 당시 유행했던 게임에선 두 사람이 마주보고 차를 몰았다. 정면충돌을 피하려고 먼저 핸들을 꺾으면 ‘치킨’이, 버티면 ‘히어로(영웅)’가 된다. 이기려면 히어로가 되겠다는 의지와 담력이 필요하지만 버즈처럼 죽어버리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상대방이 치킨일지, 히어로일지 판단하는 게 담력 못지않게 중요한 게임이다.
치킨게임은 비슷한 시기 미국과 소련의 군비경쟁을 빗대는 말로 쓰이면서 국제정치학 용어가 되고, 게임이론의 분석 틀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게임이론의 대전제는 이렇다. ①경쟁하는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할지 계산해 의사 결정을 내린다. ②이럴 때 사람들은 주어진 조건에서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
서해 연평도를 무대로 벌어진 남북 대결에서 ‘게임’이란 표현이 언론에 등장한 것은 먼저 포격 당한 남한이 20일 사격훈련을 강행할 때였다. 강하게 나온 북한에 강하게 맞서는 모양새가 마주달리는 자동차 같다는 뜻에서 ‘치킨게임’으로 묘사됐다. 겉은 그랬는데, 속은 어땠을까. 한반도에 전쟁 공포를 몰고 온 남북 수뇌부의 판단과 행동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게임이론으로 한번 들여다보자.
연평도 치킨게임
경희대 국제대학 문돈 교수는 게임이론을 활용해 국제정치 문제를 분석해 왔다. 11월 23일∼12월 20일 연평도를 놓고 남북이 벌인 ‘게임’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치킨게임을 하려고 자동차에 오르기 전에 미국 젊은이들이 나눴을 토크(talk·대화)를 상상해 보세요. 분명히 이렇게 말하는 친구가 있었을 겁니다. ‘이 겁쟁이야, 난 절대로 핸들을 꺾지 않아. 지금이라도 포기하라고.’ 북한도 11월 23일 연평도를 공격하기 전에 이런 토크를 했어요. 전날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남한의 서해 훈련을 문제 삼아 ‘참혹한 재난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고, 23일 오전 8시20분쯤 ‘남측이 북측 영해로 포 사격을 하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전화통지문도 보냈잖아요. 이런 말만 듣고 자동차에 오르길 포기하는 젊은이는 아마 없을 겁니다. 게임이론에 ‘칩 토크(cheap talk·빈말)’란 게 있어요. 의사 결정에 영향을 줄 만한 말이 못된다는 뜻입니다. 남한은 북한의 전통문을 칩 토크로 보고 예정대로 포 사격 훈련을 한 겁니다. 북한은 늘 그런 말을 해 왔으니까.”
그런데 북한이 정말 연평도를 타격했다. 포탄 170여발이 날아와 민간인과 군인 4명이 숨졌다.
“북한이 전면전을 벌이기 위해 선제공격을 했을까요? 그랬다면 서해의 작은 섬을 타깃으로 삼지 않았겠죠. 남한의 다음 행동을 계산해서, 연평도를 포격해도 남한이 강하게 반격하지 못하리란 판단 아래 내린 결정일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북한은 이 게임에서 퍼스트-무브 어드밴티지(first-move advantage·선제행동이득)를 쥐었습니다. 한 사람이 먼저 확 행동을 하면 선택은 상대방 몫이 되고 선택의 폭도 줄어드는 거예요. 자동차 치킨게임을 할 때 한 쪽이 핸들을 아예 뽑아버렸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이미 방향이 정해졌으니까 상대방은 정면충돌해 죽든지, 핸들을 꺾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죠. 북한의 연평도 포격에 남한이 놓인 상황이 바로 이거였습니다.”
남한은 사실상 핸들을 꺾었다. 전투기 폭격 등 확전이 될 만한 반격은 하지 않았다. 자동차 치킨게임에서도 정면충돌로 죽기보다는 치킨이 되는 게 자신에게 더 이로운 선택이라고 게임이론은 설명한다. 게임이론의 전제대로 남한은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그리고 다시 토크가 이어졌다.
“이번엔 남한이 주로 토크를 했죠. ‘북한이 또 도발하면 몇 배로 응징하겠다, 전투기로 초토화시키겠다, 교전수칙을 바꾸겠다’ 하면서 미군 항공모함을 서해에 등장시키고 엄청난 전력을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강행한 게 12월 20일 연평도 사격훈련이에요. 이번엔 북한이 선택할 차례였는데,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죠. 남한의 토크를 칩 토크로 보지 않은 겁니다. 이런 게임에서 상대방의 토크를 판단할 때 말의 수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상대방에게 코스트(비용) 지불 의사가 있는지 가늠하는 겁니다. 북한은 남한 여론을 보고 판단했을 겁니다. 북한 공격에 대응한 수위가 너무 낮았다는 여론이 비등했고, 민주주의 체제인 남한 정권이 가장 민감한 것은 여론이니까, 이번엔 실제로 확전의 비용을 치르려 할 수 있겠구나, 판단한 거죠. 그럴 때 이론상 북한이 할 수 있는 가장 이로운 선택은 역시 죽을 수 있는 정면충돌보다 일단 핸들을 꺾는 거고, 그렇게 한 거예요.”
게임 플레이어의 자질
게임이론은 1940년대 정립돼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의 수많은 연구에 인용되며 노벨상 수상자 8명을 배출한 의사결정 이론이다. 제로섬 게임, 죄수의 딜레마 게임, 사슴사냥 게임 등 여러 유형의 분석 틀이 있다. 그러나 기본 원리는, 사람들은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 계산해’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결정을 내리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게임에 유리할까?
미국 페이스대학 경영대학원 이종열 석좌교수는 한 칼럼에서 더스틴 호프만이 출연한 영화 ‘마라톤 맨’의 장면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더스틴 호프만이 미 정보국 관련 사건에 휘말려 동네 조무래기 깡패들의 도움을 받는다. 정보국 비밀요원이 깡패들을 제압하려고 먼저 권총 뽑아 들이댔다. 이런 경우 보통 먼저 총을 뽑은 사람이 협상에서 우선적 지위를 점하는데 조무래기 깡패들은 총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제히 자기들 권총을 뽑아 비밀요원을 겨눴다. 결국 그 비밀요원은 깡패들에게 밀리고 만다.”
이 교수는 “이처럼 게임에선 누가 봐도 조금 미친 듯한 쪽이 유리하다. 그런 플레이어의 협박은 먹혀들기 쉽다. 북한 김정일은 게임이론을 알아서 그런지 몰라도 게임의 실제 응용력 면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평가했다. 1990년대 국제사회가 북한과 핵 협상을 시작한 뒤로 지금까지 북한의 게임 능력 평가는 줄곧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문 교수가 매긴 점수는 좀 달랐다.
“단기적으로는 북한이 유능한 플레이어의 모습을 보일 때가 있죠.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해서 양보 얻어내고 영향력 행세하는. 하지만 길게 보면 썩 잘하는 선수는 아니에요. 게임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평판(reputation)입니다. 미친 척과 벼랑 끝 전술이 반복되면 ‘늘 그런 놈’이란 꼬리표가 붙어요. 나중엔 아무리 극단적 행동을 해도 그냥 벼랑 끝 전술로 보이게 됩니다. 상대방이 ‘쟤네들 또 자기 좀 봐 달라고 저러는 구나’ 생각하게 되는 거죠. 이건 북한의 협상 목적과 수단이 괴리되는 데서 오는 한계입니다. 북한의 가장 큰 문제는 외부 위협이 아니라 내부 경제인데, 핵을 들고 이걸 해결하려니까 계속 한계에 부딪치는 겁니다.”
그럼 남한의 게임 실력은? 역시 점수가 그리 높지 않다.
“남한이 게임에서 약한 부분은 상대방을 잘 모른다는 거예요. 게임의 기본은 상대방의 행동을 예상하는 거고, 그러려면 상대가 뭘 원하는지, 상대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북한에 대한 정보 수집과 분석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 게 연평도 사태예요. 또, 게임이론에서 최선의 전략은 ‘tit for tat(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에요. 상대방이 나를 배신할 것 같으면 나도 배신하고, 협조할 것 같으면 나도 협조하고. 그러면 최소한 지지는 않거든요. 남북관계도 협력하다가 북한이 배신 조짐을 보이면 벌을 주고, 벌주다가도 상황 바뀌면 당근 주고 해야 하는데, 협력할 땐 퍼주기 소리를 듣고 강경할 땐 지나치게 경직돼 왔어요.”
그럼, 다음 게임은?
북핵 6자 회담이 진행되던 2004년 미 국방부는 뉴욕대 정치학과 브루스 부에노 데 메스키타 석좌교수와 컨설팅 계약을 맺었다. 북핵 해법 시나리오를 연구해 달라는 주문이었고, 메스키타 교수는 게임이론 전문가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선택을 한다’는 가정 위에서 여러 변수를 놓고 그 사람의 행동을 예측하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메스키타 교수는 “미국과 중국이 북한에 안전보장과 함께 연간 10억 달러 규모의 경제지원을 한다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핵무기 생산에서 손을 떼고 지속적인 핵사찰을 수용할 것”이란 시뮬레이션 결과를 보고했다. 이는 2007년 영변 핵시설 폐쇄,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 복귀, 대북 중유 제공 등을 명시한 ‘2·13 합의’와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북한은 결국 이를 파기했고 우라늄 핵시설까지 갖춘 채 다시 ‘게임’을 하자고 링에 올랐다. 앞으로 진행될 게임이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제로섬 게임이 될지, 서로 믿지 못해 최악의 결과를 맞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 될지, 혼자 토끼나 잡는 대신 서로 협력해 사슴을 잡는 사슴사냥 게임이 될지는 남한과 국제사회 ‘선수’들의 대응에 달렸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