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라의 수다] 볼 장 다 본 나이?
입력 2010-12-23 18:01
“그럼 볼 장 다 봤네!” 내 나이를 들은 택시기사가 말했다. 거기다 아직 결혼을 안 했다는 말까지 하자 “노처녀네!” 했다. 육십이 훌쩍 넘어 보이는 그에게 왜 서른한 살이라는 나이가 그렇게 많아 보이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점을 지적하며 이상하다고 하자 그는 남자야 나이가 좀 많아도 상관없지만 여자는 서른 넘으면 유통기한 지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택시기사와의 대화는 거의 말싸움으로 끝났다. 한 한국친구는 그런 말에 신경 쓸 것 없다며 옛날 사람이고 교육을 못 받아서 그렇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택시기사보다 훨씬 젊고 교육을 많이 받은 한국 남자들이 비슷한 말 하는 걸 많이 들었다. 어디서 그런 터무니없는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남자는 나이 들수록 멋있어지고 여자는 그냥 늙어간다는 사고가 팽배해 있다.
적어도 통계적으로는 택시기사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 결혼하는 한국 남성의 평균연령이 31.7세인 데 비해 여성은 28.7세다. 그리고 한국인 친구들 중 미혼여성을 보면 서른이 넘자마자 거의 매주 소개팅에 나가거나 “빨리 결혼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데드라인이 정해져 있는 것만 같다.
대부분의 여성은 서른이 되면 노화방지 제품을 사용하고 피부 관리를 시작한다. 그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는 싸움, 언젠가는 패배하게 될 중력과의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다. 어려보이고 싶고 나이를 떠나 아름답고자 하는 소비자들의 강박적 욕구는 엄청난 규모의 시장을 키웠다. 그리고 기업들은 ‘볼 장 다 본 여자’ 소리를 들을까봐 두려워하는 여성들의 심리를 마케팅에 이용한다. 주름크림, 탄력세럼, 보톡스, 콜라겐 주입, 볼살 이식 등 영원한 젊음을 약속하는 제품과 시술은 수도 없이 많다.
왜 그 나이대로 보이면 안 될까? 31세에 꼭 19세처럼 보여야 할까? 삶의 흔적이 얼굴에 남아서는 안 된단 말인가? 그리고 여자들도 나이 들면서 더욱 근사해질 수는 없을까?
사실 내 화장대 위에도 크림과 로션이 즐비하고 어려 보인다는 말 들으면 기분이 좋다.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마치 나이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듯한 태도다. 나는 나이가 부담이 아니라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나이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꼭 앨리스 프레이저 부인이 떠오른다. 수년 전 뉴욕에서 독일유대계 신문 ‘아우프바우’를 위해 일할 때 워싱턴하이츠에 가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녀의 오빠는 미국인 화가 앨리스 니일의 그림 ‘풀러 브러시 맨(Fuller Brush Man)’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우리는 그녀의 오빠에 대해, 그가 모델이 된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당시 팔십이 넘은 프레이저 부인이 늙으면 성한 데가 없다며 넋두리를 시작했다. 마지막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주름살 하나하나 느는 것이 좋아. 내가 젊었을 때는 이렇게 오래 살 거라고 생각도 못했거든.” 프레이저 부인은 1930년대 말 오빠, 어머니와 함께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나치수용소에서 죽었다.
프레이저 부인의 말은 내 머릿속에 각인됐고 나는 그 택시기사처럼 무례한 말을 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그녀를 떠올렸다. 그리고 ‘볼 장 다 본 나이’가 돼보지도 못하고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했다.
베라 호흘라이터(tbs eFM 뉴스캐스터)
번역 김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