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출판계 결산]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 신드롬속 서점 줄도산 우울
입력 2010-12-23 17:32
2010년 출판계의 최대 화두는 역시 ‘정의’와 ‘전자책’이었다. 지난 5월 발간된 마이클 샌델 미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가히 신드롬이라 부를 만큼 출판계를 강타했다. 책은 불공정한 현실과 절묘하게 맞물리며 돌풍을 일으켰고 이런 흐름은 하반기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로 이어졌다. 정의 열풍은 특히 인문사회 출판에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이밖에 자서전이나 평전, 회고록 등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뉴미디어 발전에 따른 기술의 변화는 출판계를 크게 뒤흔들었다. 출판사들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전자책 시장의 발전 방향을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 다사다난한 한 해였지만 올해 출판계에는 우울한 소식이 더 많았다. 온·오프라인 서점간 쟁점이었던 도서정가제는 온라인 쇼핑몰의 가세로 더욱 복잡하게 꼬여갔다. 온라인 서점들은 불황 속 성장세를 이어갔지만 동네 중소서점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름 있는 향토서점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고 신간 출간은 눈에 띄게 줄었다.
인문학, 모처럼 어깨 펴고 ‘비상’
“인문서적은 한 해 3만부 팔면 중박, 5만부 팔면 대박”이라는 말이 통용되는 요즘 출판계에서 ‘정의란 무엇인가’의 70만부 판매는 그야말로 경이로운 일이다. 샌델 교수가 20년 동안 하버드대에서 강의한 내용을 단행본으로 엮은 책은 우리 독자들에게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각박해지는 우리 사회의 진실이 무엇인지 고민하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책은 한국출판인회의가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 9곳을 대상으로 집계한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무려 16주간 1위를 지켰다. 또 1981년 개점한 교보문고에서 인문서로는 처음으로 연간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정의 돌풍은 ‘경제 정의’라는 담론으로까지 확산됐다. 10월말 출간된 장하준(사진)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40일 만에 20만부를 출고하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또 인문·경제 서적들의 선전을 이끌어 냈다. 국내 최대 온라인 서점인 예스24가 지난달 21일까지 조사한 집계에 따르면 인문(사회·역사와 문화·인문) 분야 매출이 지난해 동기 대비 27%나 늘어났다. 도매서점인 송인서적이 1월부터 지난 13일까지 전국 각 서점에 출고한 도서 수를 분석한 결과 인문학 분야에선 다우어 드라이스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장-기억 시간 그리고 나이’(전체 18위)가, 사회학 분야에선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전체 29위)가, 경제·경영 분야에선 티나 실리그의 ‘스무살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전체 21위) 등이 인문학 열풍을 주도했다.
정의 돌풍은 그러나 베스트셀러만 찾는 우리 독서문화의 쏠림현상을 심화시켰다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이홍 리더스북 대표는 최근 출판전문지 ‘기획회의’를 통해 “‘정의란 무엇인가’가 시장의 유효 독자층을 혼자 빨아먹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이 가운데는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을 읽는 순수 독자가 다수겠지만 베스트셀러를 무조건 추종하는 소비층도 상당히 유입됐다고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외면 받던 자서전·회고록도 인기
지난 3월 별세한 법정스님의 책을 둘러싸고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그의 책을 출간했던 출판사들은 스님의 ‘절판 유언’과 독자들의 ‘출간 요구’ 사이에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묘한 상황에 처했다. 그의 책은 상반기 내내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했고 품귀현상을 빚었다.
교보문고 올해 에세이 분야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아름다운 마무리’(1위)와 ‘일기일회’(3위),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4위), ‘무소유’(5위),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6위) 등 그의 책이 무려 5권이나 포함됐다. 소동은 출판사들이 법정스님 책의 저작권을 지닌 ‘맑고 향기롭게’ 측과 논의 끝에 그의 책을 올해까지만 판매하기로 합의하면서 잠잠해졌다.
그동안 ‘자기 홍보 수단’이라는 오해로 국내 독자들로부터 외면 받았던 자서전도 붐을 이뤘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김대중 자서전’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운명이다’가 흐름을 주도했다. ‘김대중 자서전’은 5만5000원(2권세트)라는 고가에도 불구하고 출간 1주일 만에 초판 2만부가 매진됐고, ‘운명이다’는 교보문고 올해 정치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경술국치 100년, 광복 65주년, 한국전쟁 60년 등이 이어지면서 격동의 역사를 온몸으로 함께 한 인물들에 대한 자서전과 회고록도 줄을 이었다.
조선독립에 헌신했던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의 평전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와 테레사 수녀 탄생 100년을 기념해 출간된 ‘마더 테레사-어둠 속 믿음’,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선 박형규 목사의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 등이 눈길을 끌었다.
뉴미디어 발전에 ‘전자책’ 훈풍
2007년 미국의 최대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이 전자책 단말기 ‘킨들’을 선보이면서 불기 시작된 전자책 바람은 애플의 ‘아이패드’와 삼성의 ‘갤럭시탭’ 등 태블릿PC의 잇단 출시로 국내 출판계 주요 이슈로 부상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4월 600억원을 투입해 전자책 시장 규모를 2014년까지 7000억원 규모로 키우겠다고 발표했고, 한국출판인회의는 올해를 전자출판 원년으로 선언했다. 출판저널 등 출판전문지들도 전자책을 올해의 키워드로 선정했다.
소설가 박범신은 4월 장편소설 ‘은교’를 출간하면서 전자책을 함께 선보였고, 파울로 코엘류의 장편소설 ‘브리다’와 은희경의 장편소설 ‘소년을 위로해줘’ 등도 종이책과 전자책이 동시에 나왔다. 전자책 1인 출판사가 생겨났고 2만여명의 장르문학 작가와 만화가들이 전자책과 웹툰으로 진출했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나 스마트폰 관련 책들도 쏟아졌다.
전자책 시장은 그러나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다. 무엇보다 독자들을 전자책으로 유도할만한 콘텐츠가 부족했다. 저작권이나 가격 책정 문제, 유통과 홍보 마케팅 등도 제대로 된 기준 없어 시장 활성화에 걸림돌이 됐다. 작가와 출판사, 유통사와 대기업, 제작사 등 출판계의 주요 주체들은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급기야 온라인서점인 인터파크도서가 11월 자사에서 출시한 전자책 단말기를 구입하면 황석영 신경숙 김훈 최인호 정이현 등의 전자책 5종을 정가보다 최대 60% 싸게 제공하는 이벤트를 진행하자 김흥식 서해문집 대표가 이를 공개 비판하는 일이 벌어졌다.
할인에 또 할인… 매출 총알 탄 인터넷 서점
출판계는 전반적으로 극심한 불황을 겪었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의 등장은 젊은 독자들의 도서 구매력을 떨어뜨렸다. 실제 교보문고의 종합 베스트셀러 100위권 내 도서 판매량에 대한 연령대별 점유율을 보면 10대부터 30대까지 젊은층 점유율이 지난해 보다 떨어졌다. 20대의 경우 2008년 43.8%에서 2009년 41.1%, 2010년 37.0% 등으로 눈에 띄게 줄었다.
신간도서도 줄었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납본된 도서자료를 토대로 정리한 1∼9월 출판통계에 따르면 신간도서는 만화를 포함해 총 3만2273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3만5040종에 비해 7.9% 감소했다. 총 발행 종수의 45%를 차지하는 국내 상위 100개 출판사의 신간도서도 작년 동기 보다 19% 줄었고, 번역 출판물 역시 12.4% 감소했다. 반면 온라인 서점은 성장세를 이어갔다. 예스24와 인터파크도서는 올해 각각 12%와 20% 성장할 것으로 예상됐다.
부산의 문우당 서점과 동보서적, 울산의 문화문고 등 오랜 전통의 서점들이 대형서점의 지방 진출과 온라인 서점의 할인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폐업했다. 정가대로 판매하는 동네서점들은 더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출판계에서 상설기구로 ‘서점부도대책위원회’를 가동할 지경이었다. 독자들은 이제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고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해 책을 구매했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가 펴낸 ‘2010 한국서점편람’을 보면 지난해 말 국내 서점수는 2846개로 2007년 보다 401개 줄었다.
오프라인 서점의 몰락은 도서 가격 차별의 결과물이었다. 오프라인 서점들이 출판사로부터 정가의 70∼75%에 도서를 제공받는 사이 인터넷교보문고, 예스24, 인터파크도서, 알라딘 등 ‘빅4’ 온라인서점들은 정가의 40∼60%에 공급받아 할인폭을 늘리는 방식으로 시장 점유율을 높였다.
가격 전쟁은 G마켓이나 11번가 등 인터넷 쇼핑몰이 도서판매에 가세하면서 가중됐다. 온라인 판매는 유통구조를 왜곡시켰다. 인터넷으로 스테디셀러가 반값으로 할인 판매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신간이 팔리지 않는 현상이 이어졌다. 출판사들은 잘 팔리는 새 책을 내놓기 위해 외국 유명 작가를 찾는 데 열을 올렸다. ‘일본 유명 A작가의 선인세는 10억원, 또다른 장르 작가 B의 신간 선인세는 3억원’이라는 말이 나돌며 우리 출판인들의 어깨를 무겁게 했다.
지난 3월에는 출판물불법유통신고센터가 4개의 출판사를 사재기 혐의로 문화부에 신고했다. 결국 ‘혐의 없음’으로 결론이 났지만 전문수사기관이 아닌 문화부가 나서 조사하는 것에는 애초부터 한계가 있었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