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영신 (12·끝) ‘페스탈로치 목사’ 꿈꾸며 예람교회 개척
입력 2010-12-23 17:41
‘페스탈로치 같은 목사가 되자.’ 어릴 적 이 꿈은 사회학을 공부하고 교수로 있는 동안에도 떠나지 않았다. 버클리에서 논문을 쓰면서 버클리연합신학대(GTU)에서 신학(M.Div)을 공부했다. 교수를 할 때도 ‘믿음의 교수’에 대한 뜨거운 소명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목사 가운만 걸치지 않았을 뿐이지 목사 같은 교수였다.
그러다 1990년대 초반 대학에 대해 크게 실망하게 됐다. 대학 행정, 인사, 학생, 학과에 대해 내 나름의 기준에서 판단했을 때 아주 실망스러웠다. 그 기간은 오히려 내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됐고, 그런 실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목사라는 자리를 더 열망했던 것 같다.
목사가 되기 위한 조건은 다 갖춘 만큼 언제 목사가 되느냐가 관건이었다. 아버지, 어머니도 내가 얼른 목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셨다. 하지만 한국에서 목사 안수 받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내가 속한 예장 합동에서 안수를 받으려면 1년간 총신대를 다녀야 했다. 택시를 타고 다니면서 젊은 학생들과 함께 김세윤 박사, 박아론 박사 등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양지캠퍼스에서 1박2일간 치른 강도사 시험 역시 만만치 않았다. 경기노회의 면접을 거쳐 2001년 10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아는 분의 소개로 미국에서 온 한 목사를 만났다. 그분을 비롯해 15명 정도 모여 교회의 정체성, 역할, 방향에 대해 함께 공부했다. 개척 준비 모임이었던 셈이다. 이 모임을 통해 교회의 방향을 잡았다. 초교파에 교회건물 없이 공동목회를 하고, 설교 후엔 설교 내용을 가지고 1시간 정도 대화의 시간을 갖고, 사례비를 받지 않고, 평신도 중심에 성도 수가 40명 이상 되면 분립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해 예람교회를 개척했다. 장소는 서울 서초동 대한성서공회 건물을 빌렸다.
그런데 함께 동역하던 목사가 어느 날 예람교회의 방향에 대해 다른 얘기를 했다. 교회는 커져야 하고, 설교 후 대화의 시간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라고 말했다. 결국 개척 1년2개월 만에 교회가 나뉘어졌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시간이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내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예람교회는 오후 2시에 모여 성경공부를 하고, 3시에 예배를 드린다. 기성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있고, 기성 교회를 다니다 치인 사람도 있다. 일종의 대안 교회다. 나이가 많은 분들과 젊은이들이 함께하는 교회다. 고졸 출신도 있고, 나처럼 대학 교수도 있다. 내가 가장 의미를 두는 성경 말씀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회의 모든 칸막이를 허물어버렸다는, 사회학적으로 굉장히 의미 있는 말씀이다.
교회에서는 절대 목사가 기준이 되면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목사나 평신도는 서로 진리를 향해 어깨동무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성경 이외에 사람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고 무조건 순종하라고 하면 결코 마르틴 루터 같은 사람은 한국 교회에서 나올 수가 없다. 난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아직도 ‘페스탈로치 같은 목사’를 꿈꾸며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