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기의 溫 시네마] 사랑·갈등…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입력 2010-12-22 18:46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

20세기 초 러시아, 레프 톨스토이의 대저택 야스나야 폴리야나. 발명된 지 얼마 안 된 활동사진 카메라를 손에 쥔 사진기자들이 둘러싸고 있다. 지금의 할리우드 유명 배우인양 톨스토이의 모든 일상을 촬영하고 기록하고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인 톨스토이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잘나가는 소설가이자 세인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스타였다.

사람들은 그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주치의, 비서, 심지어 하인까지도 톨스토이와 그의 부인 소피아의 대화를 몰래 받아 적는다. 마치 일확천금을 바라며 로또를 긁듯이.

마이클 호프만 감독은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에서 톨스토이의 위대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두 가지 이야기 구조를 택했다. 하나는 톨스토이 부부의 사랑, 다른 하나는 젊은 비서 발렌틴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마샤의 사랑이다. 전자는 러시아의 아련한 석양을 배경으로 인생의 끝자락에서 들려주는 사랑이고 후자는 사랑을 시작하는 젊은 세대의 희망 이야기다.

톨스토이와 소피아의 사랑은 고결하거나 숭고해 보이기보다 오히려 현세적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하고자 하는 톨스토이의 공익성과 재산을 움켜쥐려는 소피아의 이기심은 갈등의 원인이 된다. 하지만 밤이 되면 톨스토이는 평생을 아끼고 보살핀 병아리 소피아를 위한 수탉이 되어 오직 그녀만을 위해 닭 울음소리를 내는 소년으로 돌아온다. 성자같이 흰 수염을 기른 그가 침대에서 수탉 흉내를 내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톨스토이의 유명한 말처럼 마이클 호프만 감독은 톨스토이를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스크린에 재현한다. 그럼으로써 톨스토이가 발견한 모든 종교의 궁극적 가치인 사랑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마치 성경에서의 사랑이 우리의 삶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발렌틴과 마샤의 사랑은 톨스토이와 소피아가 온몸으로 보여준 사랑의 가르침을 이어나가는 젊은 세대의 사랑이다.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랑의 순수함과 열정은 ‘전쟁과 평화’의 나타샤와 같고 ‘안나 카레리나’의 그것과 같다.

세련되고 간결하게 잘 짜인 각본, 명품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호흡과 섬세하고 생기 있는 연출력 등 삼박자가 완벽에 가깝게 어우러졌다. 톨스토이역의 크리스토퍼 플러머(‘사운드 오브 뮤직’의 트랩 대령)는 마치 톨스토이가 다시 태어난 것처럼 강한 인상을 준다. 헬렌 미렌(‘더 퀸’으로 아카데미 여우상 수상)은 톨스토이를 절절히 사랑하지만 날 선, 그러나 섬세하고 열정적인 소피아를 우아하게 연기했다. 아름답고 고즈넉한 러시아의 자작나무 숲과 세르게이 예브첸코의 감성 풍부한 음악은 겨울과 잘 맞아 떨어진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설 때면 가슴속에 꽃이 피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 꽃은 자주 들여다보고 마음속에 새기면 더욱 더 아름답고 향기롭게 살아있지만 그러지 않으면 금세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지난 11월 20일은 그가 서거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생전에 그는 그의 조국 러시아의 기득권층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당시 차르 왕정에서 볼셰비키, 지금은 사회주의에서 석유재벌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러시아로의 변화 속에 자유와 평등, 박애와 청빈 그리고 사랑을 전한 레프 톨스토이는 여전히 위험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서울기독교영화제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