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찬희] 12조7663억원 vs 570억 달러

입력 2010-12-22 18:44


1998년 여름은 무척 길고 더웠다. 20세기 최악의 엘니뇨(동태평양 열대 해상의 수온이 비정상적으로 상승하는 현상)는 억수 같은 비와 무더위를 몰고 왔다. 날씨만큼이나 우리 경제는 우울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부도, 퇴출, 구조조정이라는 단어가 터져 나왔다.

‘조상제한서’(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은행)로 불리던 5대 시중은행도 잇따라 자본잠식에 빠졌다. 돈을 빌려준 기업이 무너지니 자연스럽게 빌려준 돈을 떼이는 일이 잦았다. 그 해 3월 말 기준으로 5대 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은 1∼4%대에 그쳤다. 빌려준 돈 가운데 부실여신 비중이 20%대에 이르렀다.

그해 7월 말 정부는 칼을 꺼냈다. 5대 은행 가운데 2위인 상업은행과 4위인 한일은행을 합치기로 한 것. 자발적 합병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정부의 입김이 들어갔다. 5대 은행이 외자유치 등으로 자본을 증액하려고 몸부림쳤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정부가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정부는 두 은행을 합친 한빛은행의 주식을 3조원이 넘는 공적자금으로 사들였다. 한빛은행은 뒤에 하나로종합금융, 평화은행을 흡수했고 2001년 4월엔 정부 지분 100%의 우리금융지주로 탈바꿈했다. 98년 9월부터 들어가기 시작한 공적자금은 어느새 12조7663억원에 이르렀다.

이쯤 되자 공적자금 회수 문제가 불거졌다. 언제 돌려받을지 기약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부가 우리은행을 통해 금융업계를 쥐락펴락하기 위해 민영화를 꺼린다며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동안 정부는 몇 차례 블록세일(대량 장외매매)로 지분을 56.97%까지 낮췄다. 하지만 지난 6월 말까지 회수한 공적자금은 절반이 채 안 되는 5조3014억원에 불과하다. 여기에다 오랜 고심 끝에 지난 7월 내놓은 민영화 방안은 다시 좌초했다. 언제나 돼야 ‘본전’은 물론 ‘이자’까지 챙길 수 있을지 다시 막막해진 셈이다.

사실 시장에서는 처음부터 우리금융 민영화가 쉽지 않다고 봤다. 우리금융 탄생과정을 보면 정부가 스스로 공적자금 회수가 어려운 구조를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또 정부의 ‘의지’에 의문부호를 달기도 했다.

시장은 왜 저주에 가까운 쓴소리를 내뱉었을까. 그 배경을 설명해줄 만한 ‘사건’이 지난 6일 미국에서 벌어졌다. 이날 미국 재무부는 보유하고 있던 씨티그룹 지분 24억주를 주당 4.35달러에 매각했다. 이 매각으로 미 재무부는 2008년 10월에 투입했던 부실자산매입프로그램(TARP·일종의 공적자금) 자금 450억 달러를 고스란히 회수했다. 그동안 받은 배당금에 주식매각 차익을 합친 120억 달러는 ‘덤’이었다.

불과 26개월 만에 원금은 물론 이자까지 챙긴 셈이다. 12년이 넘도록 공적자금의 절반도 회수하지 못한 우리와 너무 큰 차이가 났다.

비결은 알고 나면 허탈한 법이다. 미국 재무부는 씨티그룹에 출자를 하면서 우선주를 취득했다. 우선주는 보통주와 달리 의결권이 없다. 대신 배당을 챙길 수 있다. 미 재무부는 씨티그룹 요청에 따라 우선주를 보통주로 바꾼 뒤 시장에 순차적으로 팔아치웠다.

반면 우리 정부는 보통주를 사들였다. 지분을 매각할 때 수많은 걸림돌이 등장할 것이라는 우려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세금을 빨리 돌려받을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기보다는 경영권 장악이 먼저였던 셈이다. 정부는 강력한 구조조정을 주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강변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다만 시장에서는 낙하산 인사와 관치(官治) 유혹에 발목을 잡힌 결과라고 달리 본다.

본마음이야 어찌 됐든 잘못 꿰어진 첫 단추는 많은 문제점을 낳고 있다. 이제라도 정부는 자산 332조3000억원의 우리금융그룹이 상대적으로 굼뜬 경쟁력을 지니게 된 까닭을 곱씹어 봐야 한다. 앞으로도 공적자금이 들어갈 은행, 기업은 언제든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함없는 의지로 새로운 우리금융 민영화 계획을 내놓길 기대한다.

김찬희 경제부 차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