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유증 커도 급한 불 꺼야” 백신 접종 극단 처방
입력 2010-12-23 01:44
정부는 마지막 순간까지 구제역 백신 접종 카드를 피하려 했다. 외견상 굴착기를 동원해 감염가축을 땅에 묻는 살(殺)처분보다 주삿바늘이 덜 부담스러워 보이지만 향후 파장과 후유증은 예방접종이 훨씬 크고, 오래간다는 인식에서다. 고심 끝에 ‘포위 예방접종(Ring Vaccination)’ 처방을 내놓은 데는 수도권과 강원도 구제역 확산세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다만 예방접종 대상은 소로 한정하고, 범위도 발생지로부터 반경 10㎞ 이내로 제한했다.
◇정부, 최후 카드 꺼내든 배경=방역당국은 그동안 역학조사를 통해 최초 발생지인 경북 안동에서부터 구제역 전파경로를 추적해 왔다. 최근 경기도 파주의 발생농장 인근 돼지분뇨 처리시설업자가 지난달 17일과 25일 최초 발생지인 안동을 다녀온 사실을 확인하는 등 수도권 구제역 바이러스의 이동속도를 거의 따라잡았다고 판단했었다.
그러나 지난 20일 강원도 접경지역인 경기도 가평 한우농장에서 구제역이 발병한 후 곧바로 강원도로 번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동안 추적해온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은 새로운 전염 양상이었기 때문이다.
농림수산식품부 관계자는 22일 “가평은 의심신고가 접수됐을 당시 내부적으로 구제역이 아닐 것으로 보고 있었다”며 “가평의 확진 판정에 이어 강원도 평창과 화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구제역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긴박해졌다”고 말했다.
이날 경기도 김포와 포천, 강원도 춘천에서 추가 확진 판정이 나오고 강원도 원주, 횡성, 철원 등지에서도 구제역 의심신고가 잇따라 접수됐다. 태백산맥 너머인 강원도 양양군 한우농장에서 구제역 의심신고가 접수된 것도 가축방역협의회의 백신 접종 결정을 이끌어낸 배경이 됐다.
◇예방접종 앞둔 정부의 고민=구제역에 대한 백신 처방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0년 3월 경기도와 충남북에서 구제역이 발생했을 때 구제역 확산을 막기 위해 백신 접종을 결정했다. 당시는 구제역 발생이 3개도 6개 시·군 15건에 그쳤고, 살처분 대상 가축도 2216마리에 불과해 살처분 보상금 71억원을 포함한 정부의 전체 국고 지출도 3006억원에 그쳤다. 당시 마지막 구제역이 발생했던 4월 15일 이후 구제역 청정국 지위를 회복한 것은 해가 바뀐 2001년 8월 31일로 무려 1년6개월 가까이 소요됐다.
그러나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지금까지 1289농가의 소 돼지 사슴 염소 등 22만4605마리의 가축이 매몰돼 살처분 보상금만 2300억원을 넘어서는 등 피해규모가 사상 최대 수준으로 불어나고 있어서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원래 예방접종은 방역당국의 예방적 조치가 구제역 확산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최악의 경우에 쓰도록 돼 있다”고 설명했다. 백신을 쓰면 살처분 대상은 줄어들겠지만 접종범위가 확대될 경우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백신비용은 10만 마리를 한 번 접종하는 데 5억∼6억원이 들지만 두 번 접종해봐야 예방효과는 85%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국내 한우와 젖소, 돼지는 모두 1300만 마리가 넘는다.
수단만 놓고 보면 채찍보다는 당근에 가깝지만 정부가 두려워하는 것은 파장과 후유증이다. 살처분만으로 구제역을 제압할 경우 구제역 종식선언 후 3개월만 지나면 세계동물보건기구(OIE)로부터 구제역 청정국 지위를 회복할 수 있지만 예방접종을 실시할 경우 1년 이상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구제역 청정국 지위를 상실하면 그동안 구제역 발생국가인 중국과 동남아시아로부터의 육류 수입을 막았던 근거도 사라진다.
◇축산농가 반발 거세질 듯=축산농가는 방역당국의 구제역 예방백신 접종 시행 방침에 반발하고 있다. 2000년 구제역 예방백신 접종을 받았던 경기도와 충남북 농장의 어미 소와 돼지가 사산(死産)하거나 성장장애를 일으키는 등 부작용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경기도 파주에서 한우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A씨(56)는 “접종으로 구제역을 막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효과도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백신 접종이 꺼림칙한 건 당연하지 않겠느냐”며 “구제역이 끝난 뒤 예방접종을 했다는 이유로 살처분하겠다면 그것 역시 맞지 않아야 할 이유”라고 항변했다.
예방접종 대상 농가들이 접종을 거부하거나 구제역 종식 후 사산한 가축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경우 그 부담은 고스란히 정부 몫으로 돌아갈 수 있어 정부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역학조사 등을 통해 구제역 예방백신 접종 범위를 제한해 향후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데 초점을 맞춰 추진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는 이날 전체회의에서 가축전염병예방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축산농가 관계자가 가축 전염병 발생국가를 방문하고 입국할 때 반드시 신고와 소독을 해야 한다. 이를 어기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또 정부는 해외 가축전염병 발병상황을 축산농가에 공지해야 하며, 축산농가가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할 경우 방역당국에 신고해야 한다.
Key Word 포위 예방접종
(링 백신·Ring Vaccination)=백신 접종 방식의 하나로 구제역 발생지를 중심으로 반경 일정 범위 내 모든 가축에 대해 백신을 접종하는 것. 더 강력한 단계로는 특정 행정구역 전체를 접종하는 ‘지역 예방접종’, 전국에 걸쳐 접종하는 ‘전국 예방접종’이 있다.
정동권 기자 danch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