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황등교회 종 이야기… 1884∼2010 탄일종 126년 메아리
입력 2010-12-22 18:03
전북 익산시 황등교회의 종은 1884년에 이미 탄일종을 울렸다. 그 종소리는 깊은 산골 오막살이에 까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국내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1885년보다 한 해 앞선다. 이 종은 당시 미국에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전국 곳곳은 쑥대밭이 됐다. 웬만큼 높은 건물, 탑은 전쟁 통에 대부분 파괴됐다. 하지만 이 종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때 종은 일본에 있었기 때문이다.
1년 후 종은 한국에 왔다. 그리고 59년간 한자리를 지키며 매년 크리스마스 때 탄일종을 울려 왔다. 이 종은 어떻게 미국에서 일본을 거쳐 한국에 왔을까. 황등교회 종은 국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교회 종으로 추정된다. 오래된 만큼 얽힌 이야기도 많을 것 같았다. 이 종과 인생을 함께하다시피 한 황등교회 봉기성(90) 김재두(79) 장로를 지난 12일 만났다.
종탑이 걷다
언뜻 보면 황등교회와 종탑은 별개다. 종탑은 예배당을 둘러싼 울타리 밖, 어린이집 앞에 있다. 이 어린이집 건물이 이전 예배당이었다. 본래 종탑은 다른 곳에 있었다. 김 장로는 “북쪽에서 20여m 걸어왔다”고 설명했다. 걸어왔다? “기중기가 없을 때는 밧줄로 종탑 다리를 하나씩 교대로 끌면서 옮겼어요. 사람이 걷는 것처럼.”
종은 미국에서 1884년에 제작됐다. 처음에는 플로리다 주에 위치한 리스퍽제일교회에서 사용됐다. 황등교회 설립자 계원식 장로의 아들인 계일승(3대) 목사는 1949년 미국으로 유학 갔다. 그때 이 교회에 출석했다. 황등교회는 계 장로가 1928년에 세웠다. 계 장로의 아버지인 계택선 장로는 평양 출신으로 항일부대에 군자금을 대줬다. 이것이 탄로 나면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숨어든 곳이 익산이었다.
리스퍽제일교회는 당시 종 교체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를 안 계 목사는 쓰던 종을 한국의 황등교회에 기증해 달라고 부탁했다. 종에는 ‘1884년’이라는 제작 연도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1884년은 미국 북장로교 소속 알렌 선교사가 의사 신분으로 조선에 입국한 해다. 선교사가 한국에 첫발을 디딘 의미 있는 시기에 종도 만들어졌다.
황등교회에도 종은 있었다. 두 번째 종이었다. 하지만 깨진 상태였다. “국산이라 그런가, 종 아래쪽에 금이 가버렸어요. 깨지니까 종소리가 ‘땡그랑 땡’이 아니라 ‘쨍그랑 쨍’ 소리를 내더라고. 교회에서 ‘종이 깨졌다’고 계 목사에게 기별을 했던가 봐. 그래서 계 목사가 꼭 종을 달라고 했던 것 같고.” 봉 장로가 기억을 더듬었다. “깨진 종의 금이 간 부분 끝에 구멍을 뚫었어. 더 이상 깨지지 말라고요. 그거 뚫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네.”
빼앗기고… 깨지고…
교회의 첫 번째 종은 일본에 뺏겼다. 1942년 태평양전쟁이 터진 이듬해 전쟁물자로 자진 납부했다. 봉 장로가 말했다. “그때는 놋그릇, 대야, 수저까지 강제로 뜯어가던 시기였지. 우리가 그냥 갖다 줬어. 안 그러면 가만뒀겠어. 그렇게 큰 놋쇠가 버젓이 상공에 걸려 있는데….” 그러고 나서 광복 후 대구에서 사온 종이 깨진 두 번째 종이다.
공부를 마친 계 목사는 기증받은 종과 함께 1950년 1월 16일 한국행 배를 탔다. 6월 25일 계 목사는 태평양을 건너는 배에서 전쟁 소식을 접했다. 배는 한국에 오지 못하고 인근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 도쿄에 내린 계 목사는 극동사령부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하게 된다. 미국에서 가져온 종 역시 사령부에 보관됐다. 그렇게 1년 반이 지났다.
황등교회에서는 종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당연히 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종을 싣고 귀국한다는 소식을 듣기는 들었지만 출발했는지도 몰랐다.
전쟁 통에 종은 관심 밖이었다. 그 사이 북한군은 황등교회를 접수했다. 지역의 공산당 앞잡이들이 주민 18명을 학살했다. 친미파라는 이유였다. 계 목사의 아내 안인호 사모도 이때 순교했다. 남편이 목사인 데다 미국까지 갔으니 친미파 중에 친미파로 분류됐다. 또 교회의 변영수 장로가 피난길에 논산에서 학살당했다.
1951년 6월 10일 교회에 연락이 왔다. 종이 부산에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교회 집사였던 봉 장로는 교인 몇 명과 군용트럭을 어렵게 구해 부산항구에서 종을 찾아왔다. “그때는 한미연합군이 남쪽을 차지했을 때야. 일단 전쟁터가 아니어서 들어온 것 같아. 곧 전쟁이 끝난다고 생각한지도 모르지. 그래도 대단해. 종을 보낸 것을 보면. 그 와중에 어떻게 종 보낼 생각을 했는지.”
봉 장로와 교인들은 종탑에 도르래를 달고 종을 끌어올렸다. 기중기가 없던 시대였다. 장정 십여 명이 매달렸다. 깨진 두 번째 종은 지역 인근 교회에 기증했다.
죽을 뻔하다
그렇게 올라간 종은 지금까지 딱 세 번 내려왔다. 한번은 종의 ‘휠’(종 옆 동그란 바퀴)을 교체하기 위해서다. 본래 휠은 나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무가 썩었다. 봉 장로가 시내를 뒤져 쇠 휠을 만들어 왔다.
“종탑 아래에서 봐서 그렇지, 어른 키로 목까지 올라오는 크기예요. 이것을 줄에 매달아 가방 지듯 짊어지고 왔지. 자전거로 8㎞를 달렸네.”
봉 장로는 그때 실명할 뻔했다. “용접하는 것 맨눈으로 보면 안 되잖아요. 촘촘히 때우라고 잔소리하며 그냥 쳐다봤어요. 그거 보지 말라고 했는데도. 그날 밤 눈이 빠지는 줄 알았어. 계 장로가 의사였기에 망정이지. 내 눈이 그때 나빠진 것 같아.” 봉 장로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언제부터 안경을 썼느냐고 했더니 “60세부터”라고 답했다. 다들 웃었다.
또 한번은 종의 ‘어깨’(종을 지탱하고 있는 쇠)가 부러졌다. 새 어깨는 종 전문 업체에 주문했다. 어깨를 교체할 때도 큰일 날 뻔했다. “종을 땅바닥에 놓지 않으려고 나무토막 위에 놨었어요. 그런데 나무 하나가 쓰러지면서 종이 발에 떨어진 거예요. 정말 하나님 은혜로 발끝 1㎜ 정도만 물렸네요. 종의 지름과 높이가 70㎝인데 그때 발에 떨어졌으면 큰일 났지.”
사고로 치자면 또 한번 있었다. 종을 때리는 추가 떨어진 것이다. 이 추는 거의 성인 주먹의 배 크기다. 다행히 아래에 사람이 없었다. 교회는 종탑 중간에 쇠판을 설치했다.
마지막으로 종을 내린 것은 1998년 6월. 단단한 재질로 종탑의 철골을 교체할 때였다. 이때를 제외하고 종은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새벽기도회와 주일 예배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묵묵히 알렸다.
90세 장로와 126세 종의 만남
그러는 사이 교회도 크게 발전했다. 면소재지에 위치한 교회로서 사립 중·고등학교를 세웠다. 황등중학교와 성일고등학교다. ‘뱃집’(지붕이 배를 뒤집어 놓은 것 같아 이름 붙여짐)에서 시작한 교회는 연면적 1157㎡ 규모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성전으로 성장했다. 별도 교육관도 있다. 1988년에는 인근 지역에 교회를 분립했다. 2008년 창립 80주년에는 익산시립합창단 초청 음악회, 불우이웃돕기 바자 등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했다.
그동안 임시 당회장 김중수 목사를 시작으로 17명의 목회자가 교회를 거쳐 갔다. 이 중 이재규(4대) 목사가 한국전쟁 때 순교했다. 종의 가치를 세상에 알린 역사학자 김수진 목사도 이 교회를 담임했다. 현재는 정동운 목사가 시무 중이다. 목회자뿐 아니라 수십 명의 종지기도 있었다. “종지기 가정은 모두 복 받았어.” 김 장로의 말이다.
요즘은 종소리 듣기가 어렵다. 시끄럽다는 민원 때문에 시내에선 없어진 지 오래다. 지역 교회들은 차임벨로 대신한다. 하지만 황등교회는 여전히 종을 친다.
이날 예배에 앞서 종지기 대신 봉 장로가 종을 쳤다. 90세로 보이지 않을 만큼 힘찼다. ‘126세의 종’에서 나오는 소리는 청량했다. 세월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복음과 같이….
익산=글 전병선 기자·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