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해 아쉬움에 ‘여자’의 얼굴 더 붉구나… 여수 여자만 해안도로
입력 2010-12-22 17:28
여자만(汝自灣)은 동쪽의 여수반도와 서쪽의 고흥반도에 둘러싸인 바다로 드넓은 갯벌과 구불구불한 리아스식 해안을 자랑한다. 순천만으로 더 잘 알려진 그 바다를 여수사람들은 굳이 여자만으로 부른다. 바다 한가운데에 여자도(汝自島)로 불리는 외딴섬이 있기 때문이다.
호수처럼 고요한 여자만의 이미지는 사뭇 여성적이다.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드넓은 갯벌이 온갖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하늘과 바다를 붉게 채색하는 낙조의 이미지가 여성적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글로써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여성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 무엇의 해답을 찾으려면 먼저 여자만에 포근하게 안긴 율촌면의 두봉마을로 가야한다. 두봉마을은 곽재구 시인이 ‘곽재구의 포구기행’에서 갯마을의 어스름을 노래했던 와온마을과 이웃한 갯마을. 점령군처럼 밀려왔던 바닷물이 물러나자 갯벌에서 바지락 등을 채취하는 아낙들의 긴 그림자와 갈대밭에서 날개를 접은 채 무심한 척 먹잇감을 노리는 왜가리 한 마리가 그림 같은 풍경을 그린다.
리아스식 해안이라 간혹 길이 끊기기도 하지만 여자만 해안도로는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갯마을들을 거미줄 같은 소로로 연결한다. 두봉마을에서 물러나 863번 지방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달리다 상봉삼거리에서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여자만이 꼭꼭 숨겨놓은 광암마을이다.
광암마을은 여자만에 점점이 떠있는 어선과 검은 실루엣의 여자도, 그리고 해무로 흐릿한 고흥반도의 팔영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해넘이의 명소. 이곳에서는 여느 바다처럼 태양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장관을 연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늘과 바다를 붉게 채색한 태양이 팔영산을 비롯한 고흥반도의 크고 작은 산 사이로 사라지는 풍경은 이별하는 연인의 뒷모습처럼 애잔하다. 황홀한 빛의 잔치가 끝나고 어둠이 내려앉는 빈 바다의 이미지를 황지우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물기 남은 바닷가에/긴 다리로 서 있는 물새 그림자/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서서/멍하니 바라보네/저물면서 더욱 빛나는 저녁바다를”
소라면 사곡마을을 달리는 해안도로는 바다에 거칠 것이 없어 여자만의 노을을 가슴에 가득 품는 낭만가도이다. 언제부턴가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곳의 언덕배기에 예쁜 카페가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카페 ‘티롤’의 바닷가 창가에 앉아 진한 커피향을 즐기며 시시각각 변하는 여자만의 노을을 감상하는 것은 호사 중의 호사.
노루 꼬리만큼 남은 경인년의 해가 짙은 구름 사이로 빛줄기를 쏟아낸다. 회색 구름과 바다가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해무 속에 숨었던 여자도가 쑥스러운 듯 나신을 살짝 드러낸다. 커피가 식을 때쯤 해가 짙은 구름층을 뚫고 바다에 안긴다. 물 빠진 갯벌이 깨진 거울 파편처럼 빛을 반사하고, 여덟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팔영산은 서서히 어둠 속으로 침잠한다.
나희덕 시인은 이 순간을 “산이 가랑이 사이로 해를 밀어 넣을 때/어두워진 바다가 잦아들면서/지는 해를 품을 때/종일 달구어진 검은 뻘흙이/해를 깊이 안아 허방처럼 빛나는 순간을 가질 때/해는 하나이면서 셋, 셋이면서 하나”라고 노래했다.
소라면 사곡리의 장척마을은 매년 12월 31일에 해넘이 행사가 열리는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유명하다. 장척마을 앞의 복개도는 하루에 두 번씩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무인도. 자갈과 뻘로 이루어진 신비의 바닷길은 바다생물의 보고로 물이 빠지면 호미로 바지락과 꼬막을 채취하는 마을 아낙들로 진풍경을 연출한다.
장척마을에서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달리면 달천마을이다. 달천마을은 육지의 육달천과 섬의 섬달천으로 이루어진 갯마을로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섬달천은 요즘 굴 수확이 한창이다. 포구에는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아낙들이 삼삼오오 쪼그리고 앉아 굴 까기에 여념이 없다.
여자만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여자도로 가려면 달천포구에서 하루 네 번 여자도로 가는 배를 타야 한다. 여자도는 대여자도와 소여자도를 비롯해 인근 무인도의 모습이 汝자 모양을 따라 위치한데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외딴 섬이라는 뜻에서 自자를 붙여 이름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천리와 이천리를 연결하는 관기방조제 주변은 갈대 군락지. 누렇게 탈색한 갈대가 바닷바람에 춤을 추는 모습이 환상적이다. 여자만을 발아래 굽어보는 해안도로는 서촌리와 이목리를 달려 화양면 공정마을에서 ‘여자만 해넘이 전망대’를 오른다. 조발도, 둔병도, 낭도, 사도, 적금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발아래 펼쳐진 모습이 징검다리 같다.
여자만 입구를 지키고 있는 이들 섬들은 조발대교, 둔병대교, 남도대교, 적금대교, 팔영대교 공사가 끝나면 여수에서 고흥까지 다리를 통해 하나로 연결된다. 낭도 옆에 위치한 사도는 공룡화석과 공룡발자국이 발견된 ‘공룡의 섬’이다. 본도, 추도, 간도, 시루섬, 나끝, 연목, 진대성 등 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사도는 해마다 음력 2월 15일쯤 7개의 섬이 ‘ㄷ’자로 이어지는 모세의 현상이 일어난다.
공정리에서 활처럼 굽은 해안을 따라 한참을 달린 해안도로는 여수반도 남단에 위치한 힛도에서 백야대교를 건넌다. 백야도는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서 극찬한 섬으로 가막만과 여자만의 입구를 밝혀주는 백야등대가 홀로 외로움에 떨고 있다. 여수의 산토리니로 불리는 백야도를 중심으로 제도, 돌산도, 금오도 등 여수의 크고 작은 섬들이 모여앉아 정담을 나누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노을에 젖은 바다를 배경으로 사랑하는 연인과 짙은 커피향을 나누고 싶으면 여수의 여자만 해안도를 달릴 일이다.
여수=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