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영신 (10) 문익환 목사 매제란 이유로 감시받아

입력 2010-12-21 18:33


아내의 오빠인 문익환 목사와는 집안 행사 때는 물론 감옥에서 나왔을 때도 찾아가 만나곤 했다. 신촌에 오실 일 있으시면 우리 집에도 찾아오곤 했다. 내가 미국이나 영국에 안식년으로 가 있을 때는 재야인사들과 함께 오시거나 혼자서 찾아오시기도 했다. 그때는 전화도 다 도청한다고 믿었기에 늘 조심하면서 대화를 했다.



내가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로 왔을 때는 유신의 절정기였다. 학교 건물마다 형사들이 상주했다. 내 방에도 수시로 와서 여러 가지를 묻곤 했다. 압력이나 감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문 목사의 매제라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1975년 9월부터 연세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해 가을 연세대 신앙강좌에 문 목사가 설교자로 오셨다. 문 목사는 서슴지 않고 설교 중에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을 하셨다. 학생처장한테 연락이 왔다. 문 목사를 자제시켜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난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 양심에 따라 하는 것이다”고 사실상 거절해버렸다. 그것은 문 목사가 내 친척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설교를 통제해서는 안 되는 한국 교회사의 입장이나 학문의 자유를 내세우는 대학의 입장에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문익환 목사의 동생인 문동환 목사도 국민교육헌장 반대운동으로 학교서 쫓겨났다.

하지만 난 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서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사회학이란 게 사회의 근본 문제와 씨름해야 하기에 강단에서도 주로 학문 차원에서 얘기했을 뿐이다. 학생들이 나한테 찾아와 시국 때문에 의논도 하고, 주장도 하고, 질문도 했다. 하지만 난 정치나 민주화운동에 끝까지 참여하지 않으려고 작정했다. 그건 학문 때문이기도 했고, 나보다 더 맑고, 양심이 깨끗한 사람들이 이미 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결심에도 불구하고 난 연세대 내에서 반정부 노선에 선 뚜렷한 교수 가운데 한사람으로 인식이 돼 갔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었다. 당시 몇몇 대학 교수들이 주축이 돼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대학가로 확산돼 갔다. 그런데 누군가 새벽에 연세대 내에 대자보를 붙여 놨다. 이런 영향 때문에 연세대에서는 나와 몇몇 교수들이 주축이 돼 직선제 개헌 요구 서명운동을 벌여나갔다.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죽었을 때는 교수들이 중심이 돼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나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스스로를 비주류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의 중심가치를 존중하지만 그 중심가치는 특정 세력이나 다수에 의해, 그 시대의 분위기에 의해 언제나 왜곡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난 비주류이고, 비주류로 사는 것을 의미 있게 생각한다. 어쩌면 진실된 삶에 대한 감수성이 살아 있는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본다. 그들은 다수에게 언제나 불편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불편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살릴 수밖에 없고, 또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비주류라고 이야기하지만 억압된 가치의 눈으로 보면 그것이야말로 중심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왜곡되지 않은 중심 가치를 찾아야 한다. 그 중심가치를 다시 세워야 할 책임, 그것은 나를 비롯한 지성인, 크리스천들의 것이라고 본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