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영성의 길

입력 2010-12-21 17:52


(24) 십자가에 죽는 훈련

세례와 성찬이 예배를 통해 십자가에서 죽는 연습이라면 영적인 삶은 매일 십자가 안에서 자기를 죽이는 연습이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두 가지로 죽는다. 먼저 법적으로 죽고 다음 육체적으로 죽는다.

문제는 육체적인 죽음이다. 육체적 죽음은 우리 삶에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현재적 죽음이다. 이 죽음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성화의 삶을 산다. 성경은 이를 “자기를 죽이라” 혹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는 말씀처럼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오해가 된 말도 없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자기를 학대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금욕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죄가 자기 몸에서 일어난다고 믿고 자기 육체를 엄하게 다스린다. 그러나 죄는 몸(body)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육신(flesh)에서 일어난다. 육신은 우리 속에서 죄를 일으키는 죄의 본성이다. 따라서 육체를 학대한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학대와 자학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부정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자발적으로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자기를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스스로 부자유와 고난 속에 몰아넣으면서 나도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서 고생하는 것은 자기부정이 아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잘 받아들이는 것과 스스로 고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은 다르다. 자기를 부정할 때 반드시 기억할 것은 나의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을 대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구원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로 이미 완성되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 된 삶을 살기 위해 죽는다. 신학자 존 오웬이 ‘신자들 속에 있는 죄 죽이기’(The mortification if sin in believers·1656)에서 말한 대로 죄를 미워하는 것이 모든 진정한 영적 죽이기의 기초다. 자기를 죽이며 살기 위해 우리가 인정할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도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육체 안에는 여전히 죄의 패잔병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죄를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하거나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쉬지 말고 그것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자살을 연구해 온 사람이 자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자살이란 돌발적 충동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자살은 오랜 시간의 무의식적 처벌행위를 통해 거듭 연습된 행동이다.” 자살이 그렇다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영적인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오래 연습된 내면적 행동의 결과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자기 죽음은 자기와 싸우는 일을 평생의 과제로 삼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영적 축복이다. 마치 가면 쓴 남자의 이야기와 같다. 한 남자가 평생 가면을 쓰고 살았다. 가면은 남자의 얼굴을 훨씬 돋보이게 했다. 그래서 남자는 평생 가면을 벗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죽어 가면을 벗겼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죽은 사람의 얼굴이 가면의 모습과 똑같이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가면도 오래 쓰면 가면처럼 변하는 것처럼 매일 자기를 죽이며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살면 우리도 모르게 예수님을 닮게 된다. 우리의 최고 소망은 예수 안에 죽고 우리 안에 예수님이 대신 사는 것이다.

이윤재 목사 (한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