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김광웅] 여성이 권력의 중심에 서려면
입력 2010-12-20 17:54
“숭고한 인간의 가치를 확인한다면 여성 중심 세상이 더 아름답지 않을까”
1970년 ‘미래의 충격’을 발표한 후 40주년을 기념해 다시 미래를 내다보면서 앨빈 토플러는 21세기에는 여성이 권력의 중심에 선다고 예언한다. 리더십 이론에서도 여성성을 말하며 전에 없던 친절함, 상냥함, 부드러움 등의 표현이 등장해 거친 힘이 리더십의 덕목인 듯 남성 사회를 상징하던 내용도 점차 바뀌어 가고 있다.
여성 정상의 등장은 대륙에 따라 차이가 크다. 클레오파트라를 예외로 하면 아프리카는 거의 전무하다. 7명의 여성 대통령이 있었던 라틴아메리카에는 지난달 선거에서 이긴 브라질의 지우마 호세프를 비롯해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코스타리카의 라우라 친치야 등 3명의 현직이 있다. 아시아권에는 인디라 간디를 비롯해 반다라 나이케, 코라손 아키노 등 여성 정상들이 심심찮게 있다.
모계사회가 재현될 것이라는 예견 속에 바야흐로 여성들이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동하고 여성성의 보편화가 눈앞에 다가온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다양화가 핵심이 된 21세기에 여성이 사회 중심이 되고 권력의 중앙에 선다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지식 정보사회에서는 실력으로 모든 것이 판가름 나니까 성에 대한 편견은 희석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사회는 비대칭적이지만 상호보완성을 띠고 공존하고 있다. 문제는 한쪽의 정의가 다른 쪽의 정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리고 내가 있고 남이 있다는 이원성이 본질이 된 사회에서는 항상 대등하냐 아니냐를 따지게 된다. 우리 의식 속에는 ‘여기 있음’에 대한 ‘남·다름(otherness)’이라는 관념이다. 17세기를 지나면서 인간, 자아, 개인이 우리 사고의 모형이 됐다. 그러자 남을 보는 전혀 새로운 방식이 생겼다. 그는 피부색이 누런 남이다.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인류 중 특별한 무리며 남들은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를 쓴다. 당신은 여자이고 나는 남자다. 데카르트 이후부터 일반 공간 내부에 특별영역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남·다름’에 대한 경계가 만일 무너지고 무시된다면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던 것들 사이의 긴장이 하나의 선험적 추상 개념으로 치부되고, 그런 다음 본질적이지 않은 구별들이 중심을 차지한다면 또 어떻게 될까? 동시에 성별 관계가 전도돼 남성이 오히려 상실감에 휩싸이면 그 사회는 또 어떻게 될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성별 간의 평등관계는 회복이 어려워지고 이들은 ‘이중의 게토’ 속에 꽁꽁 갇혀버리게 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이반 일리치).
여성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는 것이 또 다른 불평등으로 가모장적 권위주의를 초래한다면 그 또한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여성은 ‘영원히 남성의 어렴풋한 그림자일 뿐’이라는 말(프로이트)이 전도되면 그 또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상호보완성을 또 둘러대겠지만 이제부터는 사회와 그들 관계에 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 출발은 본질 천착이다. 전후, 좌우, 상하, 그리고 과거와 현재라는 4차원의 관계는 너무 다양한 만큼 대칭과 비대칭, 평등과 불평등 등이 늘 내연하는 가운데 통합이라는 허상만 좇는다. 그래도 이들 간의 차이를 조금이라도 극복하는 길은 맹목적으로 믿으려는 근본주의나 공연히 의심해 보는 상대주의를 넘어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의심하는 믿음’(피터 버거)을 바탕으로 공감하는 것 이상이 없다. 의심하는 믿음은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고백이며 그래서 늘 자성하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을 묻고 또 묻는 것이다.
마침 ‘소유의 종말’을 써서 시간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던 제러미 리프킨이 최근 낸 저서 ‘공감의 시대’가 내일을 기약할 듯싶다. 19세기 과학주의와 도구적 합리주의에 묶여있던 논리들, 이른바 물질과 에너지의 생산을 지고지성으로 생각하던 것에서 벗어나 인정과 존중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생명의 고귀함에 다시 한번 고개 숙이고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 사이의 틈 속에 숨어있는 진리를 믿어도 보고 의심해 보기도 하면서 숭고한 인간의 존재가치를 확인한다면 여성 중심 세상이 훨씬 더 편하고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김광웅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