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동재] 죽기로 하면 살고
입력 2010-12-20 17:56
로마와 카르타고가 정면으로 충돌한 제2차 포에니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218년.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전투 코끼리를 앞세우고 알프스를 넘었다. 당시 모든 이들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한니발은 그 같은 상식을 파괴하는 과감한 전술을 택했다. 카르타고의 병력은 4만여명에 불과했지만 트라시메누스 호반(湖畔) 전투를 비롯해 각지에서 로마군을 격파했다. 로마는 70만명의 보병과 7만명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한니발은 맨땅에서 병사들과 함께 자고 거친 음식을 함께 먹으며 그들을 격려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비록 조국이 아닌 타국의 망명지에서 평소 지니고 있던 독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보여줬던 군인으로서의 자세는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기원전 49년 1월 10일.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영어명 줄리어스 시저)는 마침내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강인 루비콘을 건넜다. 무장한 군대가 루비콘을 넘는 것은 반역을 뜻했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결단을 내리면서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한 말은 어록으로 남았다. 카이사르의 절대적인 힘은 군에서 비롯됐다. 특히 이베리아 반도 서부를 제압하기 위해 기원전 61년 창설된 10군단(Legio X)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했던 보병부대로 꼽히고 있다. 비록 평균 신장 1m63㎝에 불과한 체구였지만 이들은 최대 45.4㎏에 달하는 짐을 진 채 하루에 40㎞를 행군하는 강인함을 과시했다. 종신 군사독재자였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시대를 활짝 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무력을 써서라도 포클랜드를 탈환할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철의 여인으로 불리던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즉각 군사작전을 실시할 것을 명령했다. 대처 총리는 긴급히 소집된 의회에 출석,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나는 결코 (우리가)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그 같은 가능성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확신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개전 75일째인 6월 14일 아르헨티나는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당시 엘리자베스 여왕의 둘째 아들 앤드루 왕자는 헬기 조종사로 참전,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전함이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싸운다면 능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단 12척의 배를 이끌고 출전해 133척의 왜군을 격파한 명량해전을 앞두고 충무공 이순신이 선조 임금에게 보냈던 상소문에는 누란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지키려는 진한 애국심이 배어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그가 없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찌 됐을까.
지난달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과 우리 군의 연평도 해상 사격 훈련을 둘러싸고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돼 남북이 정전상태에 있음을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 등 주변국들은 각자 국익을 반영해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훈련 중지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지구촌의 숱한 전쟁사는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평화는 단지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인천상륙 작전을 감행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1951년 4월 9일 미 의회에서 고별연설을 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던 맥아더 장군은 전쟁에 대한 정의를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내렸다. 그는 “나는 ‘전쟁광’이 아니다”라며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없다(there is no substitute for victory)”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 승리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패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리 군이 화기를 손질하고 군화 끈을 바짝 조여야 할 때이다.
이동재 선임기자 dj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