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영신 (9) 고국의 후학 가르치려 유신시절 귀국

입력 2010-12-20 17:49


학위를 끝내고 국내로 돌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그대로 미국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종신재직권(tenure)을 받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미국에 정착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미국에서 일생을 살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내가 공부한 이유와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내가 받은 달란트가 작지만 한국에 돌아가서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공부하고, 무엇을 위해 공부해야 할지를 알리는 수많은 목소리 가운데 한 목소리라도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평소에 존경하던 백낙준 박사 같은 분이 행정을 하지 않고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역사학만을 연구하셨다면 어떻게 됐을까’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직도 우리가 역사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에 가고, 다른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수많은 유학생들이 미국에 가는 그런 일은 없어도 되지 않았을까. 만약 한국에 돌아간다면 선배들이나 교수들, 백 박사도 하지 못했던 그런 것을 이루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면 좋지 않을까. 다른 일 하지 않고, 심지어 정치활동이나 민주화운동도 양보하면서 학문의 길을 가야 하지 않을까’ 등의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아일보 광고 무더기 해약사태가 벌어졌다. 동아일보가 줄기차게 유신반대 논조를 유지하자 박정희 정권이 1974년 말부터 광고무더기 해약이라는 보복조치를 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 각계각층의 국민들이 동아일보에 격려 광고를 실었다. 그때 나도 ‘이럴 때 우리도 광고를 좀 해야 되지 않나’라며 미국의 유학생, 지인들을 찾아가 모금활동을 벌였다.

이 일을 계기로 고국에 돌아가겠다는 내 결심은 확고해졌다. 내 박사학위 논문 초고는 이미 74년 11월에 벨라 교수에게 다 제출된 상태였다. 난 유신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75년 8월에 귀국했다. 마침 그 즈음 아내의 오빠 되는 문익환 목사나 문동환 박사가 한국 사회의 표면에 서서히 두각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저분들이 민주화운동을 하시는데 나까지 한국에 가서 그 일을 할 수는 없다. 만약에 그 일을 한다면 나는 미국에 남아서 민주화운동을 해야지 한국에 가서까지 할 필요는 없다. 한국에 간다면 순수하게 대학의 울타리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무엇보다 학계를 학문하는 분위기로 만들자는 게 내 생각이었다. 아주 혹독하게 학생들을 다룬 기억이 난다. 강의 때 모든 학생들에게 자리를 정해줘 앉게 했다. 이름과 번호가 적힌 자리표에 따라서 학생들에게 질문해 강의가 느슨하지 않고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게 했다. 학생들 사이에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을 만들었다. 동료가 발언하는 것을 존중하고 경청하는 태도, 엄격한 논쟁을 벌일 수 있는 그런 훈련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했다. 나 또한 일방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 존중과 대화, 그리고 토론을 시민의 기본소양으로 중요하게 봤기 때문이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