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애옥] 나이야, 오너라!
입력 2010-12-19 19:08
흔히들 ‘나이를 먹다’는 표현은 나이를 먹어가며 없애는 것이라고, 나이 먹음에 대해 위무한다. 그래서 새해를 맞는 마음이 그렇게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 것을 어찌하랴. 요즘 세월 흘러가는 것을 인정하고 순응하는 웰 에이징(Well aging)이라는 말이 자주 거론되고 있다. ‘세월에 저항하기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라는 의미에 무게중심을 둔 것이다. 사실을 바꿀 수는 없으니 세상에 태어나 살아온 햇수를 인정할 수밖에.
다만 그 ‘나잇값’이라는 말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나이 든 사람은 ∼해야 한다’라고 규정된 틀 안에 나를 몰아넣고 싶지 않은 것이다. 과거에 있지도 않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지도 않은 지금 여기를 살고 싶다. 카르페 디엠, 지금 현재를 즐겨라! 이것이 나이 든 사람의 화두가 되었다.
그렇다고 현재를 즐기는 방법이 젊은 상태로 머물기 위해 인위적으로 젊은 모습을 추구하는 게 되어서는 안 된다. 얼마 전 만난 선배 한 분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철저히 요즘 유행의 첨단을 보여주는 차림이셨다. 물론 평소에도 패셔너블했지만 선배가 그동안 보여준 배려와 포용 등은 10대 후반의 소녀 옷을 훔쳐 입은 광대 같은 복장에 묻혀버렸다. 만나고 돌아오는데 뭔가 씁쓸하고 슬펐다.
선배는 누군가에 대한 관심은 지식을 낳고 그 지식이 쌓이면 오해가 풀리고 이해하게 되고, 그 이해가 쌓이면 결국 사랑으로 전해지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던 사람이다. 성품이 깊고 좋은 선배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왔고, 그 선배에 대한 지식이 쌓여 사랑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 중간 단계인 이해가 안 되어 안타깝다. 젊음 속에는 대답이 없고 늙음 속에는 물음이 없다 하였는데 난 묻고 싶었다. 왜 그렇게 처절하게 어린 여자 차림으로 나타나야 했는지를.
나 자신도 젊은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예술대학 선생인 덕분에 비교적 자유롭게 젊은이들의 캐주얼 비슷한 옷차림으로 강의하기도 한다. 내 안에도 나이가 주는 무게를 거부하고 싶은 욕망이 늘 꿈틀거린다. 새해를 맞으려니 늘어난 이 숫자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고 낯설다. 그래도 세상에 나와 늘리고 있는 나이테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최소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혹은 심술궂은 모습으로 나이테를 채워가고 싶지는 않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서 “나이야 가라!”라고 외친들 나이테가 줄어들지 않을 것이 아닌가. 비가 내리고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몰아쳐도 나이테가 희석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어느 편에 가깝든 나를 성찰하는 데에는 나이, 그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다만 ‘나잇값’이라는 말에 스스로를 속박하지 않고 자유의 날개를 단 영혼으로 살리라.
그러다보면 나이가 저만치 물러나서 이런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살다보면 내 얼굴에 그어질 나이테가 여배우들 나이를 짐작케 하기 어려운 모습처럼 곱게 그려지지 않을까. “나이야 오너라!” 하면서도 나이를 거부하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웰 에이징을 소망하면서도 말이다.
김애옥 동아방송예술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