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영신 (8) 대학원서 반려자 문익환 목사 여동생 만나
입력 2010-12-19 18:21
공군 제대 후 대학원에 복학했는데 당시 대학원생 가운데는 여학생이 많지 않았다. 아내 문은희는 그 당시 다른 학생들보다 나이가 많은 ‘올드미스’였다. 연세대 의대 2년을 다니다가 교육심리 전공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동기 여학생들이 항상 ‘언니’라고 불렀다. 그녀는 수업 시간에 질문도 하고 발표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런 은희와는 금방 친해졌다.
은희와 나는 교단으로 보자면 대조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녀는 문익환 목사의 동생으로 당연히 ‘기장’의 영향을 받았고, 난 보수적인 ‘예장’에서 자랐다. 하지만 우리 둘은 차이를 별로 못 느꼈다. 당시는 문 목사가 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전이었다. 그냥 평범한 한신대 교수셨다.
내가 먼저 유학을 떠나고 은희는 4주 후에 미국에 도착했다. 당시 학교에서 1시간 거리에 그녀의 오빠인 문동환 목사 아내의 집이 있었다. 은희와 나는 주말이면 결혼 전에 그 집엘 찾아가곤 했다. 결혼은 유학간 뒤 1년이 지나서 했다. 우리가 다니던 교회에서 했는데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존 크로스 목사가 주례를 했다.
내가 공부하는 동안 아내는 일을 했다. 그래도 난 생각이 열린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남자가 먼저 공부하고 여자가 나중에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쩌질 못했다. 나 중심적인 생각이었다. 아내는 버클리대 내 연합신학대학원 도서관에서 일했다. 내가 장학금을 받기는 했지만 혼자만 겨우 생활할 수 있는 형편이었기에 아내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박사 논문을 쓰기 시작할 쯤인 1971년 아기가 생겼다. 아이를 볼보는 일을 겸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부는 힘들어졌다. 그래도 점심때면 가끔씩 도서관에 있는 아기를 데리고 집에 가서 아내가 짜놓은 모유를 먹이던 일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어쨌든 아내는 이후로도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귀국 후 아내는 연세대에서 교육심리 박사과정 논문만 남겨놓은 상태로 여성개발원에서 일을 했다. 이후엔 전주대 교수로 있다가 46세에 영국 글래스고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아내는 교수를 오래 하지 못했다. 연세대 교수로도 부임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 당시 문익환 목사가 정권과 전면적인 대치에 나서면서 겪게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 목사는 “나 때문에 은희가 그렇게 됐다”며 아내와 나를 볼 때마다 미안해하셨다.
아내는 알트루사라는 단체에서 오랫동안 상담일을 해오고 있다. 거기서 발행하는 계간지 ‘니’의 편집인도 맡고 있다. 아내는 한국 여성들의 우울증을 연구해 한국 여성들만의 독특한 심리구조를 ‘포함이론’으로 규명하기도 했다. 이혼 위기, 가정폭력 등에 시달리는 수많은 여성들이 정신건강을 되찾아 사회운동을 하도록 돕고 있다.
아내는 사회에서 억눌리고 불만 있는 자들의 얘기를 들어주자는 생각으로 봉사하고 있다. 난 그런 아내의 정신이 나의 ‘변동 신학’ 이론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변동이나 변화란 것은 체제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 변두리의 사람들은 불편하고 어렵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체제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불편한 게 없다. 이 시대 변방의 사람들과 더불어 있는 것은 성서 속 예언자의 전통과 닿아 있다고 아내와 나는 생각한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