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거룩한 고민

입력 2010-12-19 18:20


마태복음 19장 16∼30절

본문의 부자 청년을 통해 우리에게 던져진 예수님의 질문을 대할 때 우리는 종종 내 마음에 편한 대로 그 질문을 바꾸어 버리거나 이른바 합리적인 대답을 도출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예수님이 살던 시대와 오늘날은 너무도 많은 차이가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더 복잡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 시대에 예수님의 이런 요청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불가능합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간의 과학과 문명은 발전해 왔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그다지 많이 변한 것 같지 않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을 형성한 수메르인이 남긴 기원전 2000년경의 토판 문서 내용 중 학교에서 선생과 학부모 사이에 촌지가 오간 내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수메르 시대는 물론이고 예수님 당시나 오늘날 사람들이나 결국 그 본성만큼은, 그리고 살아가는 모습만큼은 거기서 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본문에 나타난 부자 청년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 당시 사회라고 해서 부유층이 없던 것은 아닙니다. 많은 재산을 쌓아놓은 부자들, 정치권력을 손에 움켜진 권력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빈부 격차와 권력의 유무에 상관없이 동시대의 사람들을 향해 오늘 본문 내용을 요청하셨다면 우리를 향해서도 마찬가지 요청을 하실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의 청년처럼 우리는 교회에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들을 정도의 헌신과 믿음을 보이고 있지만, 단 하나 우리에게 있는 재물이 아까운 마음이 든다면 이제 즉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나누어주고 예수님만을 따라나서야 합니까?

솔직히 고백하건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말씀 그대로 순종하기는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목사인 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본문 26절에서 사람은 할 수 없어도 하나님으로 인해서는 가능하다고 희망을 주시네요. 그렇습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주님의 장성한 분량만큼 성장해간다면 가능성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일을 위해 우리의 고민은 늘 계속되어야 합니다. 내 삶에 젖어있는 타성과의 싸움이라는 고민,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다는 고민, 내가 열심히 모은 재산을 하나님의 일에 드리고는 싶지만 아깝다는 고민 등….

이런 고민이 우리 안에 살아있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인줄로 믿습니다. 동시에 이런 거룩한 고민이 우리 안에서 사라졌다면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의 절대적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이 땅에서의 우리 시간을 다 마치고 주님 앞에 서게 될 모습일 확률이 더 높습니다. 그러니 고민이 그저 고민만으로 끝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거룩한 고민이 내 안에 살아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이며 조금씩 하나님을 닮아가는 모습으로 성화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한 고민을 멈추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 순간순간 말씀 앞에 나를 세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지금은 나중 된 자의 모습이지만 하나님 앞에 설 때는 먼저 된 자의 모습을 꿈꾸는 소망 중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한준식 목사(새일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