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예수는 누구인가

입력 2010-12-19 19:05


(25) 예루살렘의 목표 지점

독일에서 사는 교민들을 가끔 만난다. 독일에서 산 지 20년 이상 되는 교민을 만나면 애잔한 슬픔 같은 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분들이 고국을 떠난 때 우리나라는 참 어려웠다. 코리아라는 나라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아니 그런 나라가 있는지도 모르는 때였다. 광부나 간호사로 취업해 와서 설움도 많이 겪었을 것이다.

이 나라에서 30년 가까이 간호사로 일하시는 어느 권사님 말씀이 처음에 이곳에 와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단다. 당시 한국에서 정식으로 간호대학을 나오셨으니 여성으로서 엘리트였다. 간호사로 취업해 왔는데 청소부터 시작해 여러 허드렛일을 많이 해야 했다. 후진국에서 왔다고 무시하는 걸로 생각하고 서럽기도 했고 그래서 싸우기도 했다. 독일어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 싸울 때는 속 시원하게 한국말로 욕하면서 싸웠다. 조금 지나면서 독일어가 익숙해지는데 싸울 때 쓰는 말이 먼저 잘 나오더란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으실 게다. 사람 나이가 육십이 넘고 삶을 잘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깊어질 무렵이면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다. 가끔 교민 분들에게서 느껴지는 애잔함이 그래서일 테다. 23년을 살면서도 문득 내가 왜 이곳 독일까지 와서 살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단다. 직장 때문에 이곳에서 살지만 나도 비슷한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왔지….’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면서 참 놀라운 것이 여러 가지인데 그중 하나가 예수님의 길이 아주 명백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걷는 길은 예루살렘으로 나 있다. 다른 데로 빠지지 않는다. 가끔 곁길로 가서 소일하지도 않는다. 일직선으로 예루살렘을 겨냥하여 길이 내달린다.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예수의 삶은 속도가 빨라진다. 예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분이 목표로 삼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공개된다. 반면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정체도 폭로된다. 종교적 가식이나 예의로 포장된 교만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예수의 최측근 제자들까지도 예수와 충돌하니 더 말해 무엇하랴. 헌신한 것 같은데 사실은 자기 성공을 위한 포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목표 지점이 예루살렘이 아니다. 꼭 찍어서 목표 지점을 말하면 예루살렘이라고 해서는 부족하다. 예루살렘 안에 있는 어느 한 지점이 목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자마자 다른 데 둘러보지 않고 곧장 그곳으로 간다. 마가복음 11장 11절이 이렇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예수의 목표 지점은 예루살렘 안에서도 성전이다. 예루살렘에 들어간 첫날 성전으로 직행하신다. 꼼꼼하게 모든 걸 둘러보신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성전의 상황을 마음과 영혼에 담았다. 예배의 형식은 있지만 예배의 삶이 없는 것을, 성직자는 있지만 예배자는 없는 것을, 사람들은 많지만 하나님의 임재는 없는 것을, 성전 장사꾼들은 있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없는 것을…. 아, 예수님은 성전의 슬픈 현실을 심장으로 끌어안고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꾹꾹 눌러 참으면서, 그래서 눈물이 속으로 강처럼 서럽게 흐르는 채로 베다니로 철수하신다.

지형은 목사 (성락성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