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47) 창덕궁 신선원전 빗장을 열다
입력 2010-12-19 17:30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사적 제122호)의 여러 전각 가운데 아직도 일반에 공개되지 않아 손때가 타지 않은 비밀의 공간을 들라면 신선원전(新璿源殿)을 꼽을 수 있습니다. 1921년에 건립된 신선원전은 태조부터 순종에 이르는 조선 국왕 열두 명의 초상화를 모신 진전(眞殿)으로 이전에 세워진 선원전과 구분하기 위해 이름 앞에 신(新)자를 붙였답니다.
1820년대 초반에 그려진 동궐도(東闕圖)를 보면 옛 선원전이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동쪽에는 신주를 모시고 서쪽에는 영정을 모신다는 주례(周禮)에 입각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최후의 선원전이자 유물이 남아 있는 유일한 전각인 이곳은 관람이 제한된 때문에 창덕궁 어느 곳보다도 고즈넉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랍니다.
신선원전 주변에는 볼거리도 많습니다. 외삼문 맞은편 북쪽에 자리잡은 의효전(懿孝殿)은 본래 덕수궁에 있던 정면 3칸 측면 3칸짜리 팔작지붕 건물로 순종비였던 순명비(1872∼1904)의 혼전으로 쓰인 곳이지요. 훈련도감 북영(北營) 군사들이 활쏘기를 하던 장소인 괘궁정(掛弓亭)은 1849년에 지어진 것으로 북한 양강도 혜산시 압록강 절벽에 있는 조선시대 정자와 비슷합니다. 신선원전 문간채 정면, 의효전 왼쪽에 위치한 몽답정(夢踏亭)은 훈련대장 김성응이 북영에 지은 정자로 1759년 영조가 대보단(사당)에서 이곳을 바라보고 꿈속을 거니는 정자라고 해서 몽답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정조 역시 몽답정을 찾아 휴식을 취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동궐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아 그 이유가 아리송할 뿐입니다.
신선원전에 봉안됐던 48본의 어진(御眞)은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됐고 제례에 사용되던 각종 기물과 의장물 역시 상당수 없어진 상태랍니다. 다만 감실(龕室) 앞에 놓여 있던 노부(鹵簿·임금이 나들이할 때에 갖추던 의장) 등은 2002년에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현재 신선원전에 남아 있는 것은 용상과 오봉도(五峯圖) 및 모란이 그려진 병풍 정도입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최근 동산문화재 지정학술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신선원전에 대한 종합보고서인 ‘최후의 진전, 창덕궁 신선원전’을 펴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로 패망한 조선왕실의 비운이 어려있는 신선원전이 건립된 지 90년 만에 빗장을 열고 도록으로나마 모습을 드러낸 것이죠. 조사 결과 현존하는 유물은 대한제국기 이후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합니다.
예컨대 감실을 비롯한 당가(唐家) 용상(龍床) 각답(脚踏) 등의 가구나 시설물은 전통적인 주칠(朱漆)이 아니라 황색으로 다시 칠했다는군요. 오봉병(五峯屛) 매화병(梅花屛) 어진교의(御眞交椅) 등 회화 및 공예품 또한 새로운 화학 안료를 사용한 것이랍니다. 조선왕실의 정신이 깃든 신선원전을 도록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전면 개방하는 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문화과학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