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원동 ‘묻지마 살인’ 용의자 잡고보니…폭력 게임에 빠진 美 명문대 중퇴생

입력 2010-12-17 20:43

이달 초 발생한 ‘잠원동 살인사건’은 폭력성 오락에 빠진 미국 명문대학 중퇴생이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 잠원동 한 아파트에서 가족과 사는 박모(23)씨는 지난 5일 새벽 컴퓨터 게임 ‘블레이블루’에 심취해 있었다. 무기를 들고 싸워 상대를 쓰러뜨리는 1대 1 격투 게임이다. 게임으로 밤을 샌 그는 부엌에서 흉기를 챙겨 옷소매에 숨겼다. 집밖으로 나가 가장 먼저 마주친 사람을 죽일 생각이었다.

박씨는 30m쯤 떨어진 곳에서 김모(26)씨를 발견했다. 박씨 집과 70m쯤 떨어진 아파트에서 홀어머니와 사는 김씨는 귀가 중이었다. 아파트 입구 5m 앞에서 박씨는 흉기를 꺼내 김씨의 등과 허벅지, 옆구리를 찔렀다. 박씨는 피 흘리며 달아나는 김씨를 뒤쫓다 큰 길로 들어서자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피 묻은 흉기를 씻어 제자리에 갖다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가족은 아직 자고 있었다.

칼에 찔린 김씨는 오전 6시30분쯤 집에서 200m가량 떨어진 천주교 교회 앞에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출혈로 숨졌다.

경찰은 인근 방범 감시카메라에 찍힌 인상착의를 토대로 16일 박씨를 검거했다.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박씨는 침대 매트리스와 이불만 있는 자신의 방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평소 그는 담배를 살 때를 빼고는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박씨는 미국 뉴욕주립대 심리학과를 3학년까지 다니다 지난해 7월 그만두고 귀국했다. 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었다고 그는 진술했다. 미국으로 갈 때만 해도 그는 평범했다.

박씨는 ‘강남 8학군’에 속하는 반포동의 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반에서 7등 수준을 유지했고 성적이 잘 나오면 전교 10등까지 했다. 서울대 법학과에 진학하는 게 고교 시절 유일한 목표였다.

부모는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지만 학력을 중시하는 입시 체제에서 박씨는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는 서울시내 상위권 대학 법학과에 진학했으나 1년 만에 자퇴하고 유학했다.

검거 당시 범행 사실을 부인하며 함구하던 박씨는 17일 오전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을 조사하던 경찰관에게 “공부만 하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다”며 “(유학 전인) 3~4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박씨에 대해 살인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 관계자는 “박씨와 피해자 김씨는 일면식 없는 사이로 뚜렷한 범행동기도 없다”며 “반사회적 인격 장애, 게임 중독에 따른 충동 조절 장애 여부 등이 작용했는지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