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대학가 풍미한 ‘곰스크로 가는 기차’ 번역본 나오기까지
입력 2010-12-17 17:47
1. 1992년 봄 서울 청운중학교 교생 실습실은 오슬오슬 추웠다. 서강대 독문과 4학년이었던 안광복(40)씨는 곱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독일어 사전을 뒤적이고 있었다. 송요섭 교수의 ‘중급 독문강독’을 수강하던 그는 교생 실습 때문에 중간고사를 치를 수 없었고 송 교수는 시험 대신에 교재로 쓰고 있던 텍스트를 번역 제출하라는 과제를 내주었던 것이다. 과제로 하는 번역은 재미없다. 그러나 그는 점점 텍스트에 빠져들었다. 쉽고 아름다운 문장. 가슴을 아리게 하는 감미로움. 번역은 어느 덧 과제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교생실습이 끝나고 다시 캠퍼스로 돌아왔지만 번역은 계속되었다. 여기엔 23살 젊은이의 치기도 있었다. 텍스트를 번역해 당시 좋아하던 여학생에게 생일선물로 주고 싶었던 것이다. 텍스트는 독일 작가 프리츠 오르트만의 ‘곰스크로 가는 기차’(북인더갭)였다.
2. 세월은 흘러 ‘곰스크로 가는 기차’는 그의 삶에서 잊혀졌다. 군 입대 즈음 ‘곰스크로 가는 기차’ 번역물을 선물했던 여학생과의 인연도 끝나고 제대 후의 삶도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 무렵 신촌 대학가에 그가 타자기로 친 번역물이 나돌았다. 누군가는 PC통신에 번역물을 올리기도 했으며 그는 ‘곰스크로 가는 기차’의 최초 소개자로 세상에 알려졌다. 한 방송국에서는 단막극으로 만들겠다며 연락을 취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숨가빴던 대학원 수업과 그리스 유학 준비, 그리고 취업으로 이어지는 바쁜 일상 속에서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다시 떠올릴 여지가 없었다.
3. 2010년 가을, 그는 한 출판사에서 메일을 받았다. 최초의 소개자로 알려진 그에게 이 소설에 대한 짤막한 해설을 맡기고 싶다는 원고 청탁서였다. 그때 그는 불현듯 자신이 ‘곰스크로 가는 기차’의 주인공의 삶과 자신이 닮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그리스 유학을 가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번역하는 고전문헌학자가 되겠다는 패기만만한 청춘의 꿈을 접고 마흔 살의 고등학교 철학교사가 되어 있었다. 유학을 준비하던 27살 때 3년만 돈을 모아 유학을 가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에게도 사랑은 찾아왔고 가정을 꾸려야 했다. 그는 이제 두 명의 아이를 거느린 가장이 되었고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철학교사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학구열만큼은 감출 수 없어 모교에서 뒤늦게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는 지금도 책장에서 손때 묻은 그리스어 사전과 플라톤 전집을 치우지 못하는 영원한 철학도다. 그리스는 그에게 곰스크였다. 그럼에도 불구,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 텍스트의 최초 번역자라는 소문은 소문에 불과합니다. 사실 누가 최초의 번역자인지는 알 수 없지요. 번역본도 여러 종이 나돌았으니까요. 소설 출간을 계기로 제가 최초 번역자라는 부담감에서 풀려났으면 합니다.”
4. 저작권 계약을 맺고 이번에 정식으로 출간된 소설의 번역자는 안광복씨가 아니라 그와 비슷한 시기에 연세대에서 독문학을 전공한 출판사 대표 안병률(40)씨다. 그 역시 90년대 초반, 연세대 문학동아리에서 번역 사본을 돌려 읽으며 토론을 벌인 마니아 가운데 한 명이다. 이 소설을 쓴 독일작가의 다른 작품까지 어렵게 찾아내 번역을 마친 그는 국내 최초 소개자로 알려진 안광복씨를 수소문해 해설을 맡겼던 것이다. 대체 20년 전 대학가의 수많은 청춘남녀들은 무엇 때문에 이 소설에 열광했던 것일까. 안병률씨는 “정말 위대한 시인 아니면 소설가가 될 줄 알았던 우리들은 하나같이 그럭저럭 먹고사는 샐러리맨이 되었다”며 “그런 의미에서 곰스크란 단어는 불안한 미래와 암울한 현실의 반대급부이자, 개인의 이루지 못한 꿈을 넘어 우리 앞에 놓인 미래를 상징하는 고유명사였던 셈”이라고 말했다.
5. ‘곰스크로 가는 기차’의 줄거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가 기차를 타고 여행길에 오른다. 목적지는 곰스크. 남자가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들어온 꿈의 장소로 평생에 꼭 한 번 가야할 운명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행 중 우연히 내리게 된 작은 마을에 정착하면서 이곳을 떠나지 않으려는 아내와의 갈등 끝에 결국 곰스크로 가는 꿈을 접고 만다. 가고 싶었지만 가지 못한 운명, 이루고 싶었으나 이루지 못한 꿈. 이것이 이 소설에 담긴 강렬한 역설이자 이 소설의 매력이다. 다른 수록작 ‘럼주차’ ‘양귀비’ ‘붉은 부표 저편에’ 등도 인생의 순간순간들이 실은 평생과 대결하고 있다는 심오한 미학을 담고 있다.
6. 프리츠 오르트만(1925∼1995)은 생전에 아주 적은 작품만을 발표한 작가다. 아마도 이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 8편이 거의 전부인 듯 하다. 독일에서조차 그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다. 독일 북부 해안가인 프리슬란트 지방에서 태어나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성장했고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에서 전쟁포로생활을 했으며 이후 영국과 독일에서 공부하고 터키 이스탄불에서 독일어교사로 근무했다는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부인의 주소가 스페인으로 되어 있다는 게 최근에 확인된 정보일 뿐, 그는 사진조차 공개되지 않은 베일 속 작가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