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아침] 양육의 핵심

입력 2010-12-16 18:48


10여년 전부터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아이를 낳으십시오. 양육은 국가가 책임지겠습니다”라든가 “안심하고 일하실 수 있도록 보육정책을 만들겠습니다”라는 공익광고를 자주 듣는다. 사실상 정치적 구호에 해당하는 이 말들은 마치 부모가 아이를 낳기만 하면 국가가 데려다 키워 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실제로 정부는 24시간 보육 시설과 직장 어린이집, 방과후 학교 등에 엄청난 돈을 퍼부었다. 그렇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다. 저출산 문제는 여전히 심각해서 OECD 국가 중 최저 출산율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으로 청소년들은 점점 포악해져서 부모나 조부모를 살인했다는 소식도 이제 새로울 것 없게 들린다. 또래 친구를 이유 없이 ‘왕따’시키고 괴롭히는 일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됐다. 부모들은 사회가 흉포해진 탓이라고 근심하고, 아예 이민을 결심하기도 한다.

모든 사회악이 정부 보육정책에서 비롯됐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정치인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백년지대계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하지 않고 유아교육과 보육, 양육을 포퓰리즘에 이용하기 때문에 부작용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얼마 전 24시간 보육시설에서 시설장이 아이를 상습적으로 구타한 일이 알려져 사회적 공분을 샀다. 나는 그 24시간 보육시설에 아이를 맡긴 부모들이 둘 다 은행원이라는 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업무가 아무리 많다 해도 은행원이라면 정상적으로 출퇴근하는 직업에 해당한다. 부모가 늦어도 저녁 안으로는 집으로 돌아올 것인데 어떻게 아이를 주중 내내 어린이집에 맡긴단 말인가? 아침에 아이를 준비시켜 어린이집에 보내고 저녁에 데려오는 것이 정말 불가능했을까, 아니면 번거로웠을까?

은연중에 우리는 “국가가 아이를 키워준다”는 말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명백히 현대판 ‘아동유기’다. 그리고 정치인들이 나서서 이런 현상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아이들은 부모 등 애착관계를 가진 어른과 생활하면서 어떻게 생활하고 행동하며 살아야 옳은지를 자연스럽게 배운다. 이것은 그 어떤 학습보다도 중요하다. 이런 기회가 없거나 적은 아이들은 심리적 정신적 문제를 키울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아이가 태어날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질을 닮은 신성(神性)을 아이에게 심어서 보내신다. 이 신성이 피어나려면 부모의 애틋한 사랑과 엄청난 인내,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단언컨대 국가라는 존재는 부모가 될 수 없다. 자녀의 양육과 교육은 어디까지나 부모의 신성한 임무이고, 국가는 부모가 이 막중한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게 돕고 정책을 만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어마어마한 재정과 현대적인 시설, 교육 프로그램이 보육에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부모가 일차적 책임을 다할 때만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런 책임이 수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쏟아지는 돈은 아이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아이가 불행하면 사회가 불안해지고 국가가 허약해진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부모들이 자녀를 제대로 키울 수 있도록 부모교육을 실시하고, 가정친화적인 사회를 만들어가자.

이원영 <중앙대학교 유아교육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