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위해 떠난 길, 문명을 만들다

입력 2010-12-16 17:27


역사를 뒤흔든 대이동 7가지·역사를 결정한 대정복 8장면/베이징대륙교문화미디어/현암사

유럽인들은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아시아인 중 가장 유명한 인물로 누굴 꼽을까? 아마도 대부분은 무시무시한 ‘테러리스트’였던 훈족의 지배자인 아틸라를 꼽을 것이다. 4세기 중반 돈강의 서쪽에 난데없이 등장한 아시아계 유목민족인 훈족은 100여년 동안 유럽을 휩쓸며 찬란했던 고대 문명을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이들은 알란족과 동고트족을 정복하고 서고트족까지 몰아내면서 우랄 산에서 카르파티아 산에 이르는 광대한 동유럽 평원을 장악했다.

특히 434년 훈족 지배자가 된 아틸라가 벌인 수많은 만행은 유럽을 벌벌 떨게 했다. 아틸라는 동로마 제국을 공격할 때 병사들이 도시를 마음껏 약탈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로마인이 ‘훈족’의 이름을 1000년 동안 잊지 못하게, 다시는 감히 훈족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피로 얼룩진 잔인한 역사는 그러나 복수를 낳았다. 1400년 뒤인 1900년 중국에서 8국 연합군이 의화단 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아틸라가 했던 말을 그대로 병사들에게 전했다.

“중국인이 ‘독일’의 이름을 1000년 동안 잊지 못하게, 다시는 감히 독일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을 ‘민족의 대이동’과 ‘제국의 대정복’이라는 역동적인 키워드로 정리한 책 두 권이 나왔다. ‘역사를 뒤흔든 대이동 7가지(이하 대이동 7가지)’와 ‘역사를 결정한 대정복 8장면(이하 대정복 8장면)’이라는 책인데 미디어그룹인 베이징대륙교문화미디어가 제작한 유명 다큐멘터리 ‘전기(傳奇)’의 내용을 엮은 것이다.

대이동 7가지는 거대한 전쟁이나 영웅들만이 역사를 바꾼 것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역사는 인간의 이동과 그로 인한 문명 충돌, 전쟁, 교류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시대순에 따라 첫 번째 대이동의 주인공은 고대 인도-유럽인이 꼽혔다. 기원전 4000∼500년 고대 문명을 전파한 이들은 바퀴를 발명한 이후 실크로드가 이어지기 1000년 전에 이미 유라시아 대륙에 청동길을 개척했다. 책은 이어 월지족과 훈족, 게르만족, 슬라브계 민족, 바이킹족, 유대인 등의 이동을 세계문명의 발전 궤도를 송두리째 바꾼 대이동으로 꼽은 뒤 이들이 이동한 경로와 이로 인한 역사적 의의를 풍부한 사진과 연표 등을 이용해 설명한다.

6000년 전 지구의 인종 분포가 어땠을지, 게르만족은 어떻게 자신들을 야만인으로 취급하던 유럽 사회에 민주와 자유정신을 전했는지, 슬라브족은 어떻게 동유럽 평원을 미개 상태에서 벗어나게 했는지, 바이킹족은 어떤 항해 기술을 이용해 바다를 누볐는지, 이집트를 떠난 유대인은 어떻게 긴 세월 동안 고통스러운 방랑자로 떠돌면서도 민족성과 주체성을 잃지 않았는지 등 각 민족의 대이동이 남긴 드라마와 같은 숱한 기록과 이야기들이 책의 곳곳에 숨어 있다.

“바이킹족은 더럽지 않았다. 거주지 유적 대부분에서 빗, 족집게, 수염 칼, 귀이개 등 여러 가지 개인위생 도구가 발견되었다. 바이킹족은 비누를 만들어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을 때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유럽에는 일 년 내내 목욕 한 번 하지 않는 민족이 대부분이었다. 잉글랜드 바이킹족의 경우 매주 토요일을 목욕하는 날로 정했을 만큼 위생 습관이 거의 결벽에 가까웠다.”(‘대이동 7가지’ 314쪽)

‘대정복 8장면’은 세계사의 흐름을 스스로 써내려간 제국들의 정복 이야기를 담았다. 기원전 550∼480년 페르시아 제국의 대정복에서부터 마케도니아 제국(기원전 336∼323년), 로마 제국(기원전 3∼1세기), 훈족(3세기 후반∼5세기 중반), 비잔틴 제국(395∼1453년), 아라비아 제국(7∼13세기), 몽골(13세기), 오스만 제국(14∼16세기)에 이르기까지 한 시대를 호령한 거대 제국들의 흥망과 문명 융합의 현장을 풀어낸다.

장대한 역사 서사인 만큼 자칫 따분할 수도 있지만 책의 곳곳에 신선하고 흥미로운 일화를 소개하고 역사를 바꾼 거대 전투를 장기판 같은 도식으로 알아보기 쉽게 표현하는 등 읽는 재미를 잃지 않도록 배려했다.

“소아시아의 북부 도시 고르디온 교외에 위치한 제우스 신전의 기둥에는 단단히 묶인 ‘고르디아스의 매듭’이라는 것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이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 왕이 되리라’라는 신탁이 전해졌다. 기원전 334년 신전을 지나던 한 젊은 장군이 매듭을 주시하더니 잠시 뒤 칼을 뽑아 끊어버렸다. 이 젊은 장군은 정말 아시아의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대정복 8장면’ 55∼57쪽)

중국인의 입장에서 쓰여진 만큼 책의 일부에는 중화사상이 배어 있어 다소 껄끄러울 수 있다. 하지만 세계사를 뒤흔들고 결정한 중대한 대이동과 거대 제국의 흥망, 영웅들의 활약들은 역사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주는 계기가 될 듯하다. 출판기획자이자 전문번역가인 양성희씨가 우리말로 옮겼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