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사람-‘상자의 재구성’ 펴낸 정진국 교수] “상자는 상상이 샘솟는 기적의 공간”

입력 2010-12-16 17:26


건축 관련 서적은 어렵다. 전문 용어가 많아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은 독자라면 두어 페이지 넘기다가 책을 덮어버리기 십상이다. 건축가인 정진국(사진) 한양대 교수가 펴낸 신간 ‘상자의 재구성’(필셀하우스)은 어떤가. ‘기적의 상자를 건축적으로 작문하다’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 역시 난해한 전문 용어가 숱하게 등장하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물들을 사례로 들며 건축학을 설명하기에 쉽게 읽힌다.

“20세기 근대건축이 만들어낸 가장 눈부신 아이콘이 상자입니다. 상자는 조형과 미학의 문제를 넘어 자유로운 생각과 행동을 극대화하는 기적의 공간이지요. 그러나 천편일률적인 형태와 배타적인 공간으로 상자는 형편없는 취급을 당하고 있어요.” 저자는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의 ‘기적의 상자’를 통해 우리의 건축을 바라본다. 코르뷔지에는 건축을 설명할 때 “벽을 허물고 자질구레한 것을 몰아내, 형언불가 공간의 기적을 만들어낸다”며 기적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



전남 담양의 소쇄원(사적 제304호). “이곳 담장과 함께 석축과 수목도 물이나 바람과 같은 자연의 소리를 모아 우리에게 들려주지요. 소쇄원은 인위적으로 조성된 곳이지만 무위의 자연이 부각되어 나타나는 역설(기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건축 이야기를 하면서 그림 이야기를 곁들인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구름에 휩싸인 가장 뒤 산을 화면의 절반 가까이 차지할 정도로 강조했는데 공간의 깊이가 희생된 대신 양감이 확대됐어요. 동양산수화의 획은 그 자체가 대자연의 압축상태이며 잭슨 폴락의 액션 페인팅은 대상으로부터 얻는 내적 동력, 즉 자발적으로 그린 추상회화이기에 명화가 됐구요. 역설과 자발성이 없으면 예술이 되지 않듯이 풍류와 멋이 없으면 살아있는 건축이 아닌 겁니다.”

서울 종로의 종묘정전(宗廟正殿·국보 제227호)에 대해 저자는 “기념비적 수평성의 형상을 가진 정전은 시작은 있지만 종료가 없는 무한 성장의 개방적 체계를 상징한다”면서 “건축의 역사는 곧 건축을 향한 의지의 역사이며 최상의 인간정신의 역사”라고 역설한다. 그러면서도 서울의 한 복판에서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매우 너그러운 건축물이라고 평가한다.

이밖에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이 있는 경북 영주 부석사의 경우 일탈과 황홀경이라는 키워드로 조명하고, 빛의 무게가 담긴 서울 인사동 토포하우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듯한 경주 주말주택, 둘을 하나처럼 설계한 경기도 곤지암 가옥 등 저자 자신이 지은 건축물을 예술과 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소개한다. 시원스레 실은 건축 사진들이 책을 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