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훈장’ 춥고 배고팠던 조선의 전문직… ‘조선 전문가의 일생’

입력 2010-12-16 17:39


조선 전문가의 일생/규장각 한국학연구원/글항아리

조선의 주요 정치적 사건이나 왕 혹은 대신들의 업적은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권력과는 먼 거리에 있었던 사람들, 그 중에서도 조선 문화를 더욱 풍요하게 했던 ‘전문직’에 있는 자들의 삶은 어땠을까. 전문직이라지만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질서가 엄격하게 유지되던 시절, 테두리 안에 들어가기도 어려웠던 이들의 삶은 신산함 그 자체였다.

‘조선 전문가의 일생’(글항아리)은 조선시대 천문역산가·의원·음악가·화가에서부터 궁녀·광대·승려에 이르기까지 음지에서 조선을 떠받쳤던 사람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이들은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면서 마이너리티였고, 지배계층의 필요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기도 했다.

책은 김홍도의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도 친숙하게 여겨지는 훈장과 교육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군사부일체의 유교이념이 사회를 지배했던 조선에서 훈장들은 뜻밖에도 춥고 배고픈데다 멸시받았음이 드러난다. 조선 후기에 신분 질서가 흔들리면서 몰락한 양반들이 대거 서당 훈장이 되었고, 자연 사회적 지위도 낮아졌다. 이들은 스스로를 ‘설경(舌耕)’, 즉 ‘혀로 밭 가는 무리’라고 부르며 자조했다고 한다. 공교육인 향교 시스템이 유명무실화되는 가운데 종6품 문반이었던 교관은 누구나 기피하는 한직이었고, 사교육 기관인 서원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조선 후기의 이름난 스타 ‘달문’을 통해서는 천인이었던 광대들의 삶을 조명한다. 조현명과 박문수 등 당대의 사대부들까지 고객으로 모셨던 달문이 도성 안에 한 번 나타나면 사람들이 모두 그를 쫓아가 저자거리가 텅텅 빌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달문의 전성기도 끝이 난다. 달문이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음이 밝혀졌지만, 조정의 누구도 광대를 위해 조치를 취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궁녀를 다룬 대목에서는 왕과 세자에게 배속된 내명부의 품계까지 자세히 서술됐고, 100년 전 서울의 일수쟁이들에서는 근대 금융인의 모습을 읽는다.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사회상과 삶의 풍경이 체계적인 설명과 함께 되살아난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