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나눔 전도사가 된 억만장자 스티브 김 스토리

입력 2010-12-15 17:30


[미션라이프] 맨주먹으로 시작해 거부가 된 사람들의 얼굴엔 뭔가 독특한 표정이 있다. 의외로 고생한 흔적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 나이에 비해서 한 참 젊어 보인다. 그도 그랬다. 10년 이상은 어려 보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좀 특이한 점을 느낄 수 있다. 턱이 튀어 나왔다. 그는 이 턱 때문에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기업가의 길을 걷게 됐다. 억만장자 스티브 김(한국명 김윤종·61) ‘꿈희망미래재단 리더십센터’ 이사장 이야기다. 그는 대학 졸업 후 1976년 미국으로 떠났다. 시간 당 2달러 정도를 받으며 주경야독으로 굴지의 기업을 일궜다. 2007년엔 회사를 20억 달러에 매각, 청년실업으로 방황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기 위해 돈 보따리를 짊어지고 돌아왔다. 지난 13일 오전 서울 역삼동 사무실에서 행복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스티브 김을 만났다.

턱 때문에 육군사관학교 꿈 잃어

그가 살았던 서울 세검정은 도심에서 밀린 빈민이 사는 과수원 동네였다. 그는 3녀 2남 중 아들로 맏이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물지게를 지고 멀리 떨어진 동구 밖 우물까지 가서 물을 길어오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과였다.

그는 촛불 아래서 공부했어도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명문 경복중학교에 합격하자 이웃의 칭찬도 자자했다. 하지만 학교에 입고 갈 교복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입학식 하루 전날, 그의 어머니는 밤새 재봉틀을 돌렸다. 숙명여고를 졸업한 누나의 낡은 교복을 뜯어 남학생 교복으로 만들었다. 너무 창피해서 입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사복을 입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어쩔 수 없이 그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육군사관학교는 공부 잘하고 가난한 집안의 자식이 주로 들어갔다.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필기시험을 잘 봤기 때문에 합격은 염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외모가 문제였다.

“그것 참 다 좋은데 턱이 좀…” 감사관이 자꾸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아래쪽 치아가 튀어나와 있는 편이었다. 모든 면에서 일반적인 체형을 중시하는 육사이다 보니 주걱턱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 탈락. 그의 인생에 있어서 최초의 좌절을 맛본 순간이었다.

“가난에 한이 맺혀있었어요. 어떻게든 굴레를 벗어나 성공하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었지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열심히 공부해 69년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들어갔지요. 이듬해 박근혜 현 한나라당 의원이 입학했지만 그녀와는 특별한 인연은 없어요. 그 때 육영수 여사가 청와대로 초대해 한 번 들어가 본 적이 있어요. 제가 1년 선배죠.”

첫 직장 풀타임 임금 시간당 2달러 75센트

전자공학을 전공했지만 막상 졸업하고 보니 국내에선 큰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설령 좋은 직장에 들어간다 해도 한 없이 정체되고 무기력해질 것이 뻔했다. 머뭇거렸다간 금 새 서른이 넘을 것 같았다. 유학을 떠나기엔 다소 늦은 감이 드는 27세, 초청이민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승부수를 던졌다.

“미국 LA에 처음 도착했을 때 전 재산은 2000달러였어요. 낮엔 일 하고 밤엔 공부를 하기 위해 1000달러를 주고 중고차를 샀더니 생활비가 모자라서 엄청나게 고생했어요. 처음엔 밤에 빌딩을 청소하는 직업을 얻었지요. 돈이 있으면 사업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요.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야간대학원에 진학해서 빨리 학교를 졸업하고 엔지니어로 취직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먹을 게 없었다. 자동차 부속품을 도매하는 창고회사에 취직했다. 처음으로 얻은 풀타임 직장이었지만 임금은 시간당 2달러75센트에 불과했다. 월세 150달러의 작고 초라한 아파트에 살면서 하루하루 고달프게 보냈다.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번듯한 미국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었다. 밤마다 찬물을 끼얹고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공부했다. 언젠간 화이트칼라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수없이 되뇌었다. 마침내 캘리포니아주립대학에서 정보통신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어서 엔지니어만도 수백 명이나 되는 큰 회사에도 들어갔다. 초임은 시간당 12달러. 연봉으로 따지면 2만5000달러였다.

93년에는 대기업에 컴퓨터 네트워킹 시스템을 제작해 납품하는 자일랜(Xylan)을 창업했다. 3년 만에 미국 나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창업 5년 만에 전 세계에 60여 개 판매망을 구축, 연매출액 3억 5000만 달러를 달성함으로써 IT업계의 신화를 창조했다. 99년엔 프랑스 알카텔사와 인수합병 계약을 체결, 자일랜을 20억 달러에 매각함으로써 아시안계 최고의 억만장자가 됐다.

자일랜을 매각한 뒤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서 그는 기부나 사회공헌 활동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 그 때 ‘이왕이면 제대로 하자’는 결심을 했고 한국을 방문했다. 10년 전이었다. 전국을 돌며 아동복지시설과 노인 복지시설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한데 한국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먹이는 사업’보다 ‘살리는 사업’으로 방향 전환

“우리 아이들은 밥보다 피자를 더 먹고 싶어해요.”

그가 한국에 살던 때와는 너무 달랐다. 사회복지 정책이 비교적 잘 되어 있는 덕분에 헐벗고 굶주리며 자랐던 시절과는 비교가 안 됐다.

결국 그는 ‘먹이는 사업’보다는 ‘살리는 사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돈이 없어서 대학을 포기하는 청소년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방향으로 재단 활동의 목표를 맞췄다. 그들에게 도움을 주면 인생과 가정 전체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2001년부터 연간 200여 명의 학생을 지원해왔다. 이 중 재단의 지원을 받아 대학까지 졸업한 장학생이 160여명이다. 그들이 처한 환경은 저마다 다양했다. 부모의 사업 실패로 온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길에 내 몰린 학생, 자신처럼 교복을 사지 못할 정도의 형편으로 자퇴를 결심했던 학생, 부모을 여의고 혼자 힘겹게 생활하고 있는 학생 등 수많은 학생의 후원자가 됐다.

이렇게 수호천사를 만나 꿈을 다시 펴게 된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재단 장학회에 참석해 수기를 발표한다.

“저에게 희망이라는 것을 놓지 않게 해주신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도 수십 년 후에는 많은 후배들이 닮고 싶은 큰 바위 얼굴로 이 자리에 서고 싶습니다.”

그는 2002년부터 중국 옌볜 동포 학생들에게도 장학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350여 명이 혜택을 받았다. 또 매년 여름이면 장학생 캠프를 연다. 이 캠프 참석을 위해 멀게는 20시간 이상씩 기차를 타고 와 자신의 미래와 꿈을 펼쳐 놓는다.

그는 장학금을 받고 한국 대기업 중국 지사에 입사해 어엿한 사회인이 된 한 졸업생이 보내온 감사의 편지를 소개했다. 내용은 이랬다.

‘제 아버지는 러시아에 가서 돈을 벌어 오겠다며 불법으로 국경을 넘다 군견에 물어 뜯겨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가까스로 살아오셨어요. 그 때 저는 아버지와 집 형편이 원망스러워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 죽을 생각까지 했어요. 재단 장학생으로 선발되기 직전이었지요. 하나님이 도우신거죠.’

그는 2004년부터 북한의 나진 선봉 지역에 버스와 빵기계, 비료공장, 선박수리소 등을 지원하고 있다. 2년 전부터는 캄보디아 필리핀 네팔 등에 교사와 도서관을 지어주고 있다.

소통이 안 되는 사회엔 희망이 없어

스티브 김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 두 가지를 꼽았다. 우선 지연과 학연, 연공서열이 판치는 잘못된 기업문화가 대표적인 공공의 적이라고 했다. 또 다른 하나는 오로지 대학입학을 위해 모든 꿈과 희망을 반납하고 좌절과 절망의 골짜기로 빠져들게 만드는 학교교육 현장을 지적했다.

그는 한국의 유명인사나 기업의 최고 경영자(CEO)를 만나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진다고 털어놓았다. 소통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권의주의가 팽배해 교제하는 동안 질문이나 대화를 제대로 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고국에 들어 온지 3년이 지났지만 그에겐 아직 낯선 것이 많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지를 알기 위해 교회를 다닌다. 얼마 전부터는 그는 성남 분당만나교회에서 주일성수한다. 김병삼 목사의 열린말씀을 귀하게 듣는다고 했다.

“하나님은 저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고 계십니다. 저의 성공은 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죠. 그래서 인생의 후반전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이웃과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닐까요.”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