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영신 (6) 교육·사회·기독교 공부위해 미국 유학
입력 2010-12-15 17:53
나의 세 가지 주요 관심 범주는 교육과 사회, 그리고 기독교였다. 이 다음에 내가 무엇을 공부하든 이 세 가지를 드러낼 수 있다면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학원을 졸업할 때쯤 유학을 결심했다. 우리나라보다는 미국 대학이 여러 면에서 훨씬 체계가 잡혀 있을 거라고 봤다.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도 유학을 결심하게 된 주된 이유였다.
장학생이 되어 예일대에 들어갔다. 내가 입학한 곳은 신학부였지만 종교와 사회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곳이었다. 사회학과에 가서 청강도 했다. 졸업 후엔 목사도 할 수 있고, 신학자나 사회학자도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난 일단 사회학을 더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데이비드 리틀 교수가 종교사회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주일에 한 번씩 리틀 교수를 만나 종교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분은 학생의 관심을 적극적으로 살려주시는 아주 인격적인 분이었다.
나는 사회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었지만 예일대 사회학부가 내가 생각하기엔 좀 작고 약했다. 리틀 교수께 이런 내 생각과 앞으로의 꿈을 얘기했더니 하버드에 계신 교수 한 분을 추천해주셨다. 하버드대 사회학과 로버트 벨라 교수였다. 그는 동아시아에 대해 관심도 많고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하버드에 연락하니까 ‘벨라 교수가 지난 학기에 버클리로 갔다’고 했다. 그래서 벨라 교수에게 전화를 해 찾아가게 됐다.
1968년에 학교를 버클리로 옮겼다.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옮긴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때가 문은희씨와 결혼한 지 1년 됐을 때다. 운전면허를 딴 지 4주 만에 1700달러짜리 자동차를 사서 대륙횡단을 했다. 그때의 버클리는 지금의 버클리와 달랐다. 진보적인 데다 영국이나 프랑스 학생들도 거기에 와서 공부하고 싶어할 만큼 아주 출중한 학교였다. 특히 사회학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야였다. 내 배경이나 성적 가지고는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벨라 교수를 찾아갔더니 내 얘기를 한참 듣고 난 뒤 “일단 너도 학교를 알아야 하고, 나도 너를 알아야 하니까 1년간 시간을 갖자”고 했다. 그 교수의 배려로 1년간 동양학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동양학과에서는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 인류학을 다 공부할 수 있었다. 아주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그 기간 나는 그야말로 두문불출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오직 도서관, 강의실, 집 외에는, 심지어 말하기 부끄럽지만 1년간 교회도 나가지 않았다. 대신 집에서 성경을 읽었다. 사람 만나는 것에 대한 부담이 그렇게 컸기 때문이다.
그때 쓴 석사 논문은 일본의 기독교 지성 우치무라 간조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지성 구조를 분석하는 내용이었다. 난 일본말을 못하지만 일본어 사전을 일일이 찾아가며 토씨를 달았다. 공군사관학교 때 독학으로 일본어를 했던 게 큰 도움이 됐다. 논문은 내게 아주 유익했다. 일본의 지성사와 교회사를 훑어보는 계기가 됐다. 벨라 교수도 “논문이 재미있다”며 흡족해 하셨다. 1년간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점수가 잘 나왔다. 드디어 버클리대 사회학과 박사과정에 정식 입학하게 됐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