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서 시작한 1300리 물줄기 옛 시인 ‘別有天地’ 안부럽네… 경북 상주 낙동강 숨소리길
입력 2010-12-15 17:28
낙동강 유역에서 낙동(洛東)이란 지명을 지닌 곳은 상주시 낙동면 낙동리가 유일하다. 지금은 흔적조차 희미하지만 낙동리의 관문인 낙동나루는 원산, 강경, 포항과 함께 조선시대 4대 수산물 집산지로 꼽혔다.
김해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황포돛배는 낙동나루에 소금과 해산물 등을 부렸다. 그리고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불리는 상주에서 쌀, 곶감, 누에고치를 산더미처럼 실었다. 일제강점기까지 뱃사람과 장꾼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던 객주집과 주막은 육상 교통의 발달로 하나 둘 사라지고 지금은 낙동강한우촌으로 변신했다.
13개 코스로 이루어진 ‘MRF 이야기길’ 중 가장 아름답다는 ‘낙동강 숨소리길’은 낙동강한우촌에서 시작된다. MRF는 산길(Mountain road), 강길(River road), 들길(Field road)로 이루어진 트레킹 로드. 해발 200∼300m 높이의 낮은 산을 오르기 때문에 힘들지 않고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원점회귀코스라 접근성이 좋다.
낙동강 강둑에 올라서자 차가운 강바람이 귓전을 때린다. 낙단보 건설공사가 한창인 낙동강에서는 흐르는 강물 대신 중장비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1980년대 중반에 강 건너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를 잇는 낙단교가 생기기 전까지 나룻배에 버스를 싣고 강을 건넜지만 지금은 가뭄 때 걸어서 건널 수 있을 정도로 강바닥이 높아졌다. 준설공사가 끝나 수심이 깊어진 구간에서는 시퍼런 강물이 황포돛배가 분주하게 오가던 그 시절을 반추하고 있다.
이름조차 멋스런 ‘낙동강 숨소리길’은 이내 갈색으로 단장한 들길을 타박타박 걷는다. 전국 곶감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는 감의 고장답게 여염집 툇마루 앞에는 곶감이 주렁주렁 매달려있고, 빈들에서 날아오른 까치는 감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홍시를 쪼아 먹는다. 상주의 감은 상주둥시로 불린다. 둥시는 둥근 감이란 뜻으로 떫은맛을 내는 탄닌 성분이 50∼60일 동안의 건조 과정에서 하얀 당분으로 변해 달착지근한 맛을 낸다.
들길이 산길로 바뀔 즈음 한우 축사가 드문드문 나타난다. 축사는 감 껍질을 먹고 자라는 상주한우들의 보금자리. 이웃 시군의 한우들이 구제역 파동으로 곤욕을 치를 때도 전국 최대의 한우 사육지인 상주의 한우들은 다행스럽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낙엽이 융단처럼 두툼하게 깔려 푹신푹신한 산길과 나무계단을 오르면 첫 번째 나각산 전망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나각은 소라로 만든 악기를 뜻하는 말로 나각산은 낙동강에서 보면 소라 형태를 닮아 붙여진 이름. 멀리 낙동강을 건너는 낙단교와 낙단대교를 비롯해 낙동리의 평화로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각산의 바위는 온통 시멘트를 비벼놓은 것 같다. 바위는 퍼석퍼석한 역암으로 강돌이 바위에 듬성듬성 박혀있다. 옛날에 낙동강이 융기했다는 증거다. 살아있는 지질학 교과서나 다름없는 나각산의 정상은 해발 240m. 정상의 전망대에 오르면 비옥한 들판 사이로 구불구불 흐르는 낙동강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1300리 낙동강은 강폭이 넓어지는 상주에서 비로소 강이 된다. 조선 최초의 인문지리서 ‘택리지’를 저술한 실학자 이중환은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물길은 용궁과 함창 경계에 이르러 비로소 남쪽으로 굽어지며 낙동강이 된다. 낙동이란 상주(가락국)의 동쪽이란 뜻이다”고 말했다.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화북면 장암리에서 발원한 영강과 합류하는 사벌면 퇴강리에서 강폭을 넓힌다. 퇴강리(退江里)는 강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난 마을이라는 뜻으로 강변에는 ‘낙동강 칠백리 이곳에서 시작되다’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낙동강 1300리는 발원지인 태백을 시점으로 본 것이고, 700리는 강다운 모습을 갖춘 상주를 시점으로 본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중환이 ‘택리지’를 저술한 곳이 상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당파싸움에 휘말려 유배생활을 했던 이중환은 동가숙 서가식하며 전국을 떠돌아 거처가 따로 없었다. 호(號)가 청화산인(靑華山人)인 이중환은 택리지 발문에 “내가 황산강(黃山江) 가에 있으면서 여름날에 아무 할 일이 없어 우연히 (택리지를) 논술한 바가 있다”고 밝혔다.
청화산(984m)은 괴산, 문경, 상주의 경계에 솟은 백두대간 봉우리이고 황산강은 낙동강의 별칭이다. 택리지의 복거총론에서 ‘무릇 살터를 잡는 데는 첫째 지리가 좋아야 한다’고 설파한 이중환은 십승지의 하나로 청화산 아래에 위치한 화북면 용유리 일대를 꼽았다. 정감록에서 말하는 십승지는 흉년, 전염병, 전쟁이 들어 올 수 없는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로 무릇 사람이 살 만한 곳을 말한다. 풍수지리를 중요시 한 이중환이 낙동강의 제1지류인 영강 발원지이자 십승지 중의 하나인 상주 화북면 용유리 인근에서 택리지를 저술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낙동강 숨소리길’은 구름다리와 제2전망대를 지나면 줄곧 내리막길이다. 마귀할멈의 전설이 전해오는 마귀할멈굴과 시누대숲을 지나면 길은 낙동강으로 뻗어 내린 능선을 타고 내려가 옛길을 만난다. 낙동강변을 따라가는 옛길은 마을주민들이 낙동리의 오일장을 오가던 길로 객주와 주막이 있던 낙동강한우촌으로 되돌아온다.
때로는 잠든 아기의 숨소리처럼 정겹고, 때로는 뱃사람들의 거친 숨소리를 흉내 내던 낙동강. ‘낙동강 숨소리길’이 황포돛배 떠다니던 낙동강의 숨소리를 되찾는 그날을 기다리며 차가운 강바람에 오들오들 떨고 있다.
상주=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