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영신 (5) 공군장교 복무하며 교육·사회학에 눈떠

입력 2010-12-14 17:54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후회하는 게 별로 없지만 4·19를 경험하지 못한 것만큼은 후회하고 있다. 난 4·19를 대학에서 맞지 못했다. 대학원에 입학해놓고 4월 10일 즈음에 공군사관학교에 갔기 때문이다. ‘공군장교 하면 대학원도 갈 수 있다’는 친구들의 얘기도 있었고, 다른 대학교 출신들을 만나 교제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대전에서 6개월간 훈련받고 공군사관학교가 있는 보라매공원으로 올라왔다. 사관학교 교관으로 복역했다. 힘들었지만 군대에서 다른 학교 출신들을 많이 만났다. 아마 내가 군대에 가지 않았다면 평생 연세대 출신들만 알았을 것이다.

제대하기 1년 전부터는 대학원을 다니려고 했는데 연세대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대학원 교학과장이 한태동 박사였다. 학교 다닐 때는 그분 강의가 좋아서 청강도 했었다. 그분께 대학원 복학하러 왔다고 하니까 호되게 나무라셨다. “대학원 공부는 전념을 해도 될까 말까인데 군대에 있으면서 자네가 대학원 다닌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내가 변명조로 따졌다. “다른 대학은 되는데 왜 연세대는 안 됩니까?” 그랬더니 한 박사님은 “다른 대학은 다 돼도 연세대는 안 된다”고 하셨다. 당시 대학원은 지금과 달리 허술하고 엉터리였다. 등록금 내고 교수한테 얼굴 보이고, 그 다음 학기말에 보고서 하나 써내면 학점이 나왔다. 그렇게 해서 2년 후 논문을 쓰면 석사가 되었다. 그런데 연세대는 학사 행정을 아주 깐깐하게 봤다.

난 군대에 있을 때부터 사회학을 독학했다. 당시 사관학교는 시간이 많았다. 제대하기 몇 개월 전부터는 거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당시 공군도서관에는 다양한 사회학 서적이 있었다. 페스탈로치가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에 있으면서 일부러 사회에 대한 책을 찾아 읽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책도 많이 읽었다. 책을 통해 북한이나 러시아식 사회주의가 아닌 제3의 길인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에 깊이 매료됐다. 영국 노동당 관련 책도 내 생각의 범위를 많이 넓혀 주었다. 그런 것을 통해 난 사회학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던 것 같다. 특히 노동당의 역사를 보면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에 기독교와 깊이 연관돼 있다는 걸 아주 인상 깊게 읽었다. 군대는 내게 대학의 울타리를 넘어 교육과 사회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런데 복학을 해보니까 내가 관심을 갖는 분야는 어느 곳에서도 지도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마음에 두고 있던 한 분을 찾아갔다. 고 원일한(H G Underwood·언더우드 선교사의 손자) 박사였다. 그분께 “선생님, 지도해 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라고 하니까 그분이 한참 여러 가지 질문을 하시더니 지도해 주시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분은 오래 전부터 한 과목 정도는 언제나 가르치는 분이셨다. 하지만 선교사이기 때문에 학교 행정이나 학교 이사를 주로 하시지 강의를 많이 맡지는 못하셨다. 엄격하셨지만 나에겐 특혜를 베풀어주셨다. 그분 서재를 자유롭게 쓰게 하신 것이다. 시간이 없어 충분히 활용하지는 못했지만 아주 좋은 자료들을 볼 수 있었다. 아마 내가 그분께 지도를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학생이 아닐까 싶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